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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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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비망록 ③] 미치도록 잡고 싶던 조주빈, 드디어 수갑을 채우다

피해자들이 모아 보낸 고통과 두려움이 법정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길
등록 2020-11-26 13:37 수정 2020-11-27 04:22
2020년 3월16일 ‘박사’ 조주빈이 경찰에 붙잡혔다. 3월25일 성범죄자 가운데 처음으로 수사 단계에서 신상이 공개됐다. 공동취재사진

2020년 3월16일 ‘박사’ 조주빈이 경찰에 붙잡혔다. 3월25일 성범죄자 가운데 처음으로 수사 단계에서 신상이 공개됐다. 공동취재사진

<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엽니다. 11월27일 나오는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고민으로만 채웁니다.


*[조주빈 검거 비망록 ②] 경찰과 기자를 조롱했던 ‘박사’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557.html

3. 고마움: 2020년 2월
그의 커다란 상심에 공감하면서 그 상심에 짓눌렸고, 그를 감당하고 싶었기에,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구묘진, <악어 노트>

외로운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백기은(활동명) 활동가는 텔레그램 성착취 기사가 나오기 전부터 트위터를 중심으로 성착취 영상(링크)을 올리는 계정을 신고하고 있었다. 무력감을 느꼈다. “내가 아무리 해도 가해자들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달쯤 쉬다가 오랜만에 들어간 트위터에서 한 단체가 꾸려지는 모습을 봤다. ‘리셋’이라고 했다. “꾸준히 감시하고자, 내가 사람임을 증명하고자”(리셋) 모인다고 했다. 백기은도 손을 보탰다.

‘리셋’은 2020년 1월2일 청와대 국민청원 누리집에 국민청원을 올렸다. 같은 달 14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도 올렸다. 국제 공조 수사에 나서달라고 했다. 디지털성범죄에 관해 양형기준을 바로 세우라고도 했다. 텔레그램 성착취가 가십으로 소비돼선 안 됐다. 자극적인 청원 글이 아니었으므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는 힘들 거라고 봤다.” 다만 “최상을 꿈꾸며 최악에 좌절하지 말자”(리셋)고 생각했다. 2월10일 국민동의 청원은 10만 명을 달성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22만 명이 동의했다. 모든 언론이 텔레그램 성착취를 이야기한다. 폭발적인 분노가 일었다.

시경 수사팀은 초조하다. 수사는 진공 속에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의 압박이 더해진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경찰청장이 답변해야 하는 날(3월1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강원청이 ‘로리대장태범’을 잡고 경북청도 ‘갓갓’을 특정했다는 소식(결국 ‘갓갓’은 5월9일에야 잡힌다)을 듣는다. 전국 사이버성폭력 수사팀 화상회의에 다녀오는 유나겸 팀장 표정이 어둡다. “왜 우리는 못 잡는 거냐고, 답답한 마음에 팀원들을 다그치기도 했어요. 무당이라도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하고.”

압박감 속에 남궁선 수사관은 눈을 흐릿하게 뜬 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본다. 영상을 화면 한구석으로 작게 띄웠다. 피해자를 나누고, 특정하고 있다. 영상 속 피해자가 미성년자인지 아닌지, 영상물의 성격은 음란물인지 불법촬영물인지, 피해자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지 살핀다. 현장 경험이 많은 남궁선 수사관한테도 고통을 분류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수사기관은 피해자가 아동인지 성인인지, 성인이라면 제작과 배포에 동의했는지 파악한다. 성착취물 제작과 유포는 피해자 신고가 필요 없는 범죄다. 다만 피해자 신고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음란물(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불법촬영물(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물(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을 나누고 다른 법과 다른 형량을 적용한다. 피해자가 성인이라든가 동의 여부가 불분명해 단순 음란물로 취급받은 성범죄의 처벌 수위는 낮아진다. “잡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커지고 나서야 피해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수사기관에 소중해졌다.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과 ‘교대역 총대’가 함께 진행한 릴레이 포스트잇 주간(8월11~17일)에 서울 교대역에 붙은 스티커와 포스트잇. 디지털성범죄 근절과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리셋 제공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과 ‘교대역 총대’가 함께 진행한 릴레이 포스트잇 주간(8월11~17일)에 서울 교대역에 붙은 스티커와 포스트잇. 디지털성범죄 근절과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리셋 제공

“박사를 특정했는데, 깨보니 꿈인 거예요.”

피해자와 연락하는 일은 남궁선 수사관이 주로 맡았다. “피해자 입장에서 힘든 게 당연해요.”(각주 3) 남궁 수사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일단 02로 시작하는 번호가 뜨면 받지 않아요.

문자메시지를 먼저 보내요. 제 신원을 말씀드려요. 그래도 거의 답신이 오지 않아요. 다시 메시지를 보내요. ‘잡아야 하지 않겠냐고, 조금만 도움을 달라고.’ 그럼 내일 10시쯤 통화하자고 메시지가 오기도 해요. 정한 약속 시간에 전화를 받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럼 다음날 또… 연락이 닿아도 경찰서에 오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럼 직접 찾아가서 만나뵙죠. 땅끝도 다녀오고 수도권도 다녀왔어요.”

박사방 사건에서 경찰이 자체 시스템으로 신원을 확인한 피해자는 꽤 많다. 이 가운데 진술이 있는 이는 32명에 그친다. 이 가운데 7~8명은 남궁 수사관의 설득 끝에 진술했다. 진술은 하나하나 박사를 잡기 위한 귀한 단서다.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한 근거다. 단서와 근거는 피해자의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모인다. 다시 떠올리는 고통. 다시 말하는 고통.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던 고통. 이렇게 모아 보낸 고통과 두려움이 법정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길, 피해자들은 바랐다. 그걸 알아서 “말해준 피해자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고맙다.”(남궁선 수사관)

그즈음, 조승노 수사관은 꿈을 꿨다. “딱 박사를 특정했는데, 깨보니 꿈인 거예요. 아쉬웠죠. 그런데 근거 없는 확신도 들었어요. 다음날 과장님한테 곧 잡는다고 큰소리를….” 진술이 담긴 수사기록 가운데 몇 가지 결정적 단서를 새로 발견했다. 어떤 것은 이전에 놓친 것이기도 했다. 이전 정보와 새로운 단서, 놓친 단서, 검증한 내용을 짜맞추는 과정이 이어졌다. 2월 말 마침내 박사를 특정했다. 조주빈. 인천 거주. 25살. 수사팀에서 환호가 터진 몇 안 되는 순간이다. 보안을 위해 팀원 모두 입 다물었다. 보름여 조용히 확인 작업을 거쳤다.

조주빈에게 수갑을 채운 건 막내 이민상 수사관이다. 조승노 수사관과 함께 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어서, 순간적으로 움찔했어요. 그러니까 조 수사관님이 ‘뭐 하고 있어?’ 그랬어요. 얼른 정신 차리고 수갑을 채웠어요.” 처음 그를 마주한 순간은, 얼떨떨했다.

1월2일 프로젝트 리셋이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에 22만명이 동의했다. n번방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국제공조 수사를 해달라는 내용이다. 청와대 유튜브 갈무리.

1월2일 프로젝트 리셋이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에 22만명이 동의했다. n번방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국제공조 수사를 해달라는 내용이다. 청와대 유튜브 갈무리.

4. 2020년 3월 그 뒤
나는 흔들린다. 나는 흔들린다. 그러나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
-마거릿 애트우드, <증언들>

조주빈은 붙잡혔다. “정신없었다.”(유나겸 팀장) 조주빈은 자해 소동을 벌였고 코로나19에 걸린 것 같다고 주장했다. 성범죄자로는 처음으로 조주빈의 신상 공개를 결정했다. 처음이라 뭐가 맞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수사팀도 우왕좌왕하며 고심했다. 카메라 앞에 선 조주빈은 사과했다. 손석희 JTBC 전 사장, 김웅 프리랜서 기자, 윤장현 전 광주시장한테만. 난데없는 유명인의 이름이 또 잠시 입길에 올랐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잡는 것으로 수사는 끝나지 않는다. 조사받는 조주빈의 진술은 눈앞에 엄연한 가해와 피해, 그동안 모아온 증거와 일치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돈을 벌려고 한 것이라는 식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서 피해자의 적극적인 진술을 추가로 받아야 했다.”(남궁선 수사관) 진술을 주저했던 피해자한테 다시 연락했다. “제대로 처벌하고 싶다”고 설득했다. 피해자가 용기를 냈다. 남궁 수사관은 “뿌듯하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조주빈의 범죄 사실만은 한층 명확해졌다. 회원들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기로 하자, 4월 들어 공범들(박사방 유료회원)이 자수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추가 신고도 들어왔다.

리셋의 입법 청원으로 20대 국회에서 성폭력특별법은 개정됐다. 딥페이크 영상을 불법촬영물에 넣는 정도에 그쳤다. “실망스러웠다.”(리셋)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디지털성범죄자 양형기준을 바로잡는다. 형량이 더해질 조짐이지만 곳곳에 감경 사유는 남아 있다. 검찰은 조주빈한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구형에 앞서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늦어 귀담아듣는 이는 없었다.

흔들린다, 정신없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래도, 분명 나아간다.

<끝>

각주 3. 디지털성범죄 사건 발생시 피해자가 사건 해결에 적극성을 보이기 어려운 요인으로 ‘주변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19.1%로 가장 높다.(강희영, ‘디지털성범죄 피해의 복합성과 정책과제’

* 기사에 담긴 소설의 문장은 거장 혹은 전설의 반열에 오른 여성 소설가의 소설에서 따왔다. 각자의 방식으로 여성의 삶을 그려온 앨리스 먼로와 올가 토카르추크는 각각 2013년,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은 2019년 맨부커상을 탔다. 작가 사후 20여 년 만에 세계 출판계에 알려진 구묘진의 <악어 노트>는 성소수자(LGBTQI) 문학의 전설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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