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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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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장애] 배려보다는 평범하게 대하는 것

말해선 안 되는 게 돼버린 장애,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장애 혐오
등록 2020-11-15 20:11 수정 2020-11-19 09:44
장애를 가진 아이를 대할 때 필요한 건 배려보다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는 일이다. 아빠와 2인용 자전거를 타는 동환이. 류승연 제공

장애를 가진 아이를 대할 때 필요한 건 배려보다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는 일이다. 아빠와 2인용 자전거를 타는 동환이. 류승연 제공

“엄마, 내가 진짜 장애인 맞아? 내가 왜 장애인이야? 왜! 왜 나를 장애인으로 낳았어!”

절규하는 자식 앞에서 부모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속 대사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현실에서 일어나는, 또렷한 삶의 한 모습이다.

나를 왜 장애인으로 낳았어

얼마 전 특수교사들과 만나 수다를 떨었다. 발달장애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디어 콘텐츠에 관해 이야기하다 한 콘텐츠에서 나온 비장애인이 ‘장애인’이란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한 게 도마 위에 올랐다.

교사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가르쳤던 학생 가운데 청소년기에 들어서야 발달장애 진단을 받고 복지카드(복지의 하나로 발급되는 일종의 장애인 신분증)를 발급받은 학생이 있다고 했다. 그 학생은 복지카드를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커서 한동안 집 밖에 나오지 못했다고. 그런 학생도 보는 영상 콘텐츠에 자꾸 장애인이란 말이 나오는 걸 교사들은 걱정했다. 혹여 학생들이 상처받을까봐.

그때 나는 마지막 남은 바싹 불고기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식욕이 싹 달아났다. 지금 눈앞의 불고기가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에게 장애인이라고 하는 건 실례일까 아닐까. 이 문제는 단순히 호칭을 어떻게 정리할지의 차원을 넘어선다. 나와 내 아들이 살아갈 앞으로의 삶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저기요. 저는 다른 의견이에요. 왜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부르면 안 돼요?” 모두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내 목소리는 떨렸고 얼굴은 상기됐다.

전국을 돌며 많은 부모를 만났다. 자식의 장애 정도가 심하면 심한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저마다 고민이 깊었다. 때론 후자가 더 힘들 경우도 있었다. 자식이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장애를 혐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장애인으로 낳았냐며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고, 특수학급에 가지 않으려 했으며, 치료실에 가는 것도 거부했다. 마음을 겉으로 표출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자신을 부정하는 거대한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해 마음을 공격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왜 그래야 할까? 모든 게 삐딱하게 보이는 사춘기라서? 아니다. 그 때문만이 아니다. 부모인 우리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교사와 친구들이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봤기 때문이다. 장애는 나쁜 거라고.

장애? 그래서 어쩌라고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일이다. “동환아~ 안녕!” 같은 반 친구가 인사를 건넸는데 아들이 아무 말 없자 그 친구는 자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동환이는 장애인이라 말을 못해.”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랐고 친구 엄마는 당황했다. 그 엄마와 난 서로 어색한 얼굴로 마주 보다 도망치듯 인사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날 난 “오늘 장애인이란 말을 들었다”며 눈물로 밤을 새웠다. “감히 내 아들에게 장애인이라고?” 귀여운 여섯 살 꼬마에게 앙심도 품었음을 이제 와 고백한다. (미안해.) 그 엄마는 어땠을까? 얼어붙은 내 얼굴을 본 그는 아이 손을 잡고 가며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쉿,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마. 큰일 나.”

이날의 에피소드는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상황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이날 ‘장애’란 단어는 마치 불러서는 안 될 그 이름 ‘볼드모트’(소설 <해리 포터>에 나오는 악당 이름)처럼 다뤄졌다. 엄마인 내 태도에 의해 아들의 장애는 쉿~ 말해선 안 되는 것, 나쁜 것, 안 좋은 것, 불쌍한 것, 창피해서 숨겨야 하는 부정적인 것이 돼버렸다. 장애가 얼마나 나쁜지 온몸으로 잔뜩 강조해버린 건 바로 나였다. 장애인이란 말에 부정적 의미를 담아버린 내 태도로 아들의 ‘장애’는 ‘볼드모트’와 동급이 돼버렸다.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안다. 드러내놓고 경멸해야만 장애 혐오가 아니라는 걸.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기고 동정하는 것 역시 ‘장애는 안 좋은 것’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형태의 장애 혐오라는 걸.

그렇게 주변에서 장애 혐오인 줄 모르고 쏘아대는 부정적 장애 인식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란 당사자는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기부정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안 좋은 것’이 나에게 있는데…, ‘안 좋은 것’은 아무리 애써도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데…,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배고픈 게 창피하지 않듯

아들도 언젠가 자기 정체성을 인식할 것이다. 말을 못한다고 생각마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들이 쌍둥이 누나와 자기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그래서 어쩌라고?’를 속으로 외칠 수 있기 바란다. 누나는 키가 작고 엄마 아빠는 배가 볼록 나왔듯, 단지 그 정도 ‘다양함’의 하나로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기 바란다.

사회 전반의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요즘, 사람들은 장애인을 배려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한다. 이런 변화가 고맙지만 나는 좀더 욕심을 부려본다. 배려의 행동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장애’란 말에 담아버린 부정적 의미를 싹 거둬내면 어떨까 싶다. 의미를 거둬내면 남는 건 ‘어떤 상태’를 뜻하는 건조한 단어뿐이다. 신체 일부의 손상으로 기능이 저하된 사람이 장애인이다. 배고픈 상태가 창피한 일이 아닌 것처럼, 장애가 있을 뿐인 사실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쉽진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불쌍한’ 장애인을 위해서? 아니 아니, 인간인 이상 장애에서 자유로울 이는 없기 때문에. 차갑도록 명쾌한 이 진실 앞에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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