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방청은 처음인데요, 재판을 외부에 중계하는 게 흔한 일인가요?”
“피고인이 영어를 잘 못하고 가족이 한국에 사는 것이 재판부 결정에 영향을 미치나요?”
6월16일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서관 1층 6번 출입구 앞. 시민 16명이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아무개(24)씨의 미국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두 번째 재판이 서울고법에서 진행된 이날, 이들은 마녀를 따라 중계 법정에서 재판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재판을 지켜보며 손으로 빼곡히 적은 메모지가 그들 손에 쥐여 있었다. 1시간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범죄 수익 은닉, 몰수·추징, 목적범 같은 법률 용어가 재판부와 검사, 변호인 사이를 오갔다.
질의응답에 나선 마녀가 말했다. “실제 법정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하지 않아요. 논리와 논리가 싸우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보는 것도 드뭅니다. 재판 흐름을 따라가는 게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방청석에 남아서 목격하고 기록하면 좋겠습니다.”
검사는 입증책임 다하나, 피해자 추가 가해 없나
마녀는 이날 일반 시민을 상대로 ‘찾아가는 연대, 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열었다. 마녀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자, 반성폭력 활동가다. 2014년부터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면서 가해자의 형사재판을 방청하고 기록해왔다. 트위터를 기반으로 신분은 알리지 않은 채, 혼자서 활동한다. 성폭력 범죄 재판 방청으로 피해자와 연대하려는 시민이 늘자, 형사재판과 관련된 기본 지식, 방청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이번 교육 자리를 마련했다. 트위터로 소식을 알리자 참여 신청은 하루 만에 마감됐다.
아침 8시30분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시작된 모니터링 교육은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이어졌다. 오후 2시께 인천지법에서 열리는 박사방 성착취물 재유포범 ‘잼까츄’(대화명)의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마녀는 이날 공판준비기일부터 선고에 이르는 형사재판 절차, 재판 일정을 검색하고 추적하는 법 등 현장과 문헌으로 익힌 생생한 비법을 참가자들과 공유했다. 특히 재판부뿐 아니라 피고인 변호인, 검사까지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형사재판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탓이다. 국가를 대리하는 검사와 피고인 변호인이 당사자로서 공방하고 이를 지켜보던 재판부가 결론을 내린다. 검사가 제구실을 다 하지 못하면 재판부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법대에 있는 판사만 보지 마십시오. 재판부(판사) 중심으로 오른쪽에 앉은 검사와 왼쪽에 앉은 피고인과 그 변호인으로 구성된 ‘삼각편대’를 고루 지켜봐야 합니다. 검사가 입증책임을 다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변호인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명목으로 피해자를 추가 가해하지 않는지 방청석에서 꼼꼼히 체크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n명이 남기는 n개의 기록
참가자들은 마녀의 말을 놓칠세라 꼼꼼히 메모했다. 이들은 소속 없이 홀로, 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소규모 단체로 활동하는 ‘개인’들이다. 참가자 손아무개(20)씨는 이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법원종합청사로 향했다. 그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다. 그가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피해를 입증할 물증도 없었고 주변 조력자도 구하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자각했을 땐 이미 수년이 흐른 뒤였다. n번방 사건의 미성년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해 방청 연대에 나섰다고 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는 일이 없는지 집중적으로 지켜보려 한다. 피해자 사진이나 신상이 재판 과정에서 종종 공개돼서다. “피해자는 피해 회복에 힘쓰느라, 이 사건 형사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챙길 여력이 부족할 수 있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옆에 서서 재판을 감시하고 기록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모니터링 교육에 참여한 또 다른 참가자 김아무개(21)씨는 처음에는 양형 기준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재판부가 내리는 결론은 어떤 과정을 거치길래, 매번 ‘솜방망이’라는 소리를 듣나 궁금했지만, 언론 보도를 살펴봐도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다. “법정 중계를 지켜보니, 미국 쪽 수사 상황에 대한 판사 질문에 완벽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검사를 보면서 지켜봐야 할 건 재판부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재판을 방청·기록하고 SNS를 통해 공유할 생각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미 온성신(성신여대 자치언론),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 등이 n번방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방문해 재판을 모니터링하고 블로그나 트위터 등을 이용해 방청 후기를 공유하고 있다.
머릿수 채우기에서 재판 독해로
방청 연대는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는 활동의 한 축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피해자에 재판 방청으로 연대하는 2013년 ‘동행’, 2015~2017년 ‘첫사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페미니즘 운동이 재점화된 2015년, 시민단체가 이끌어가던 방청 연대가 흩어진 개인들의 느슨한 운동으로 확산됐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미투(#Metoo) 운동이 재판 단계로 넘어오면서 피해 폭로자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싶다는 이들이 방청석을 채웠다. 그러나 법률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재판 내용까지 정확히 ‘독해’해내진 못했다. 언론은 피고인이 처음 재판에 출석한 날(공판기일), 검찰의 구형량(결심공판), 선고 결과만 집중 보도했고, 그마저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에 국한됐다.
n번방 사건을 기점으로, 연대 활동은 적극적으로 재판을 해석하고 기록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성범죄에 온정적인 경찰·검찰과 사법부를 비판하는 ‘#엔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는 해시태그 운동이 보여주듯,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지는 그 전후 과정을 좇아가며 기록해 사법 시스템을 바꿔내는 게 이들의 목표다. 재판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소송 과정과 판결을 일반인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공개 재판주의 원칙에도 복잡한 형사소송 절차와 어려운 법률 용어로 인해 법정이 높은 벽에 둘러싸였다면, 방청 연대가 이제 그 벽을 뛰어넘으려 한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최원진 활동가는 “과거 재판 방청이 단순히 다수의 연대자가 피해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방청 연대는 사법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감시·기록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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