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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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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붐비는 병원 대기실에서

등록 2020-06-25 14:32 수정 2020-06-26 10:44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채혈실 앞은 아주 붐볐다. 청년부터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환자,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보호자’는 모두 걱정스럽고 초조한 얼굴이다. 다들 복도에 설치된 안내 화면을 들여다보지만, 40명도 넘는 대기인원은 좀처럼 줄 기미가 안 보인다. 번호표를 손에 들고 운 좋게 앉을 자리를 찾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내게, 어떤 이가 말을 건다. “그 번호표 어디서 뽑아요?” 60살쯤 돼 보이는 깡마른 몸, 조금 어두운 얼굴빛, 손에 든 수납영수증. ‘환자겠구나’ 생각하며, 나는 평소보다 좀더 친절하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어쨌든 여긴 3차 병원이 아닌가. 다들 아프거나 돌보는 사람이다.

병원 안 시간, 병원 밖 시간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채혈실 안쪽에 들어가는 데 성공. 열 지어 피를 뽑는 의료진 얼굴을 잠시 둘러보고 대기의자에 앉았다. 바깥 대기공간이나 안쪽 대기공간이나 정신없고 붐비는 것은 마찬가지라, 옆 사람과 바싹 붙어 앉는 것을 길게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모두 소리를 지른다. 휠체어에 앉아 눈 감고 차례를 기다리는 백발의 할머니. 목청의 인플레이션이 괴로우실 것이다. 번호를 부르자 보호자가 휠체어를 밀고 의료진 앞으로 가는데, 그 움직임이 무척 느리고 조심스러워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분명 걱정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저 느린 움직임 덕분에, 할머니는 아무와도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의료진 앞에 도착한다. 동병상련의 친절, 남의 사정을 헤아리는 다정한 마음, 무려 연대의식 같은 거창한 단어까지 떠올리며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병원에서 볼일이 끝나자 갑자기 허기와 갈증이 밀려왔다. 아픈 사람으로 가득한 이 건물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다. 병원이 아닌 곳, 질병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곳, 건강한 사람들이 분주히 살아가는 ‘바깥공기’를 쐬고 싶었다. 갑자기 조바심이 난다. 병원 오느라 밀린 일이 태산이고, 그사이 받은 독촉 문자도 여러 건이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렸다. 문이 닫히지 않고 있다. 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지? 바로 앞에 선 사람의 뒤통수를 노려본다. 내려서 걷는데 앞사람의 느린 걸음조차 짜증스럽다. 복도가 좁은데 저렇게 느리게 걸으면 어쩌자는 거야, 바빠 죽겠구먼! 친절, 다정함, 연대의식 같은 건 30분도 안 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의 알량함이 부끄러워졌다. 병원 밖으로 채 나오기도 전에, 나는 환자들의 세계가 아닌 건강한 사람들의 세계에 몸을 숨긴 것이다.

코로나19로 사회 전체가 ‘비상’이지만,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기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이다. 감염 확산 뉴스를 보는 동안에도 암세포는 꾸준히 자라고, 마스크를 사러 가는 길에도 허리디스크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선별진료소와 입구 체온 측정을 빼면, 이날 병원 풍경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이 혹은 계속 아픈 사람들에게는 ‘평소’가 이미 위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프면 3~4일 쉬라”는 말

우리는 질병을 비일상으로 여긴다. 아픈 동안에는 삶이 없고, 병이 나으면 그제야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듯이 말이다. 빨리 병원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짜증과 조바심 이면에도 비슷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환자’가 아니다, 나는 ‘이곳’이 아니라 ‘저곳’, 병원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바쁜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 말이다. ‘눈부신’ 발전과 ‘빨리빨리’의 나라. 지난 150년간 ‘과도기’가 아닌 적이 없었던 근현대사. 택배도 ‘로켓처럼’ 빠르길 바라는 사회. ‘느릿느릿’이라는 부사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곳. 그렇다면, “아프면 3~4일 쉬라”는 말의 화자와 청자는… 누구일까?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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