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만남?” “우리 집으로 와.” “간단한 만남 하실래요?” “용 돈 드립니다.”
5월 말, 기자가 ‘18살, 여성’으로 설정한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앱)을 깔자마자 31살, 36살, 18살 등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성들이 ‘성매매’를 제안하는 메시지를 쏟아냈다. ‘실제 나이는 18살이 아닌 16살’이라는 답에도 아랑곳없었다. 오히려 “섹스 경험은 있냐” 등 더 노골적인 질문과 몸 사진 요구가 이어졌다. 성매매 방법에 따라 5만원에서 25만원까지 다양한 금액을 대가로 제시하기도 했다.(사진)
메시지가 오간 시점은 상대 동의와 무관하게 성관계시 처벌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이 13살에서 16살로 올라간 형법 개정안이 공포된 이후였다. 현행법상 성매매와 유사 성매매도 불법이다.
2016년에 비해 가장 많이 늘어난 경로
랜덤채팅 앱은 익명성을 보장한다. 별도의 인증 절차 없이 나이, 성별, 닉네임, 지역 등 간단한 정보만 있으면 가입이 가능하다. 이 정보조차 허위로 입력해도 채팅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에게 나이와 신분을 속이는 데 사실상 제약이 없다. 카카오톡 등 특정되는 상대와 대화하는 채팅 앱과는 다르다. 앱에 접속하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무작위로 일대일 대화가 가능하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시작했지만, 익명성은 성매매·사기 등 범죄 수단이 되고 있다. 지난해 8월 랜덤채팅 앱에 ‘성폭행 상황극을 하고 싶다’고 글을 올린 남성도 앱에서 여성으로 활동했다.(30~31쪽 기사 참조)
스마트폰 보급 이후 활성화된 랜덤채팅 앱은 오랫동안 범죄 도구로도 악용돼왔다. 2015년 랜덤채팅을 통해 조건만남에 동원된 15살 가출 청소년이 성매수 남성에게 모텔에서 살해당했다. 지난 4월 전북 전주와 부산에서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최아무개(31)씨도 랜덤채팅 앱을 이용해 피해자를 물색하고 유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사’ 조주빈 역시 랜덤채팅 앱을 통해 피해자를 끌어들였다. 여성가족부(여가부)가 6월15일 발표한 ‘2019 성매매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청소년이 조건만남을 하는 주요 경로는 채팅 앱(46.2%), 랜덤채팅 앱(33.3%), 채팅 사이트(7.7%) 순이었다. 2016년과 비교해, 가장 많이 늘어난 경로는 랜덤채팅 앱(9.9%포인트 증가)이다.
랜덤채팅 앱 대부분은 앱의 기능을 통해 불법적인 ‘조건만남’을 사실상 조장하고 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통해 상대방의 위치를 확인한다. 또 이용자가 상대방에게 쪽지를 보내면 충전 포인트가 차감된다. 반대로 쪽지를 받으면 포인트가 생기기도 한다. 포인트가 일정액 이상 쌓이면 돈으로 환급받거나 앱에서 음식이나 상품권 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사업자는 환급금에서 수수료를 떼거나, 포인트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돈이 필요한 청소년이 범죄 피해에 노출되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놓고 사업자는 이익을 챙기는 셈이다.
소규모 사업자 규제에서 벗어나
게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쪽지가 자동 삭제되거나, 상대방이 쪽지를 삭제하면 대화 내용이 사라진다. 또 ‘사진을 공유한 이용자를 보호한다’는 등의 명목으로 화면 갈무리를 막는 앱도 30%가량 된다(2019년 4월 여가부 조사). 그래서 디지털성착취 피해를 입더라도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고 피해신고가 쉽지 않다. 진 탁틴내일 활동가는 “센터 이름으로 앱에 접속하니까 방출되더라. 업체가 성착취를 막고 싶다면 신고 기능을 만들고 활동가들의 감시활동을 막지 않고 도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랜덤채팅 앱 제재 권한을 가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도 소극적이다. 5월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2019 청소년 사이버성매매 예방활동 결과보고서’를 보면, 방심위에 삭제를 요청한 ‘아동·청소년 성착취 행위’ 계정은 508건이었다. 이 중 268건만 삭제(이용자 해지)됐다. 190건은 ‘성매매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삭제 처리하지 않았고, 19건은 ‘신고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각하했다. 김보람 십대여성인권센터 활동가는 “(성매매) 행위, 금액, 시간이 적힌 화면을 갈무리해 보내도, 초성이나 은어로 적혀 있다면 성매매 행위가 아니라며 방심위는 삭제하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국내 랜덤채팅 앱은 300~400개로 추산한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전기통신사업법 제22조에 따라 랜덤채팅 앱 사업자는 부가통신사업자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에 등록·신고할 의무가 있지만, 자본금 1억원 이하 사업자는 여기서 면제된다. 또 정보통신망법 제42조의 3에 따라 랜덤채팅 앱이 의무적으로 지정해야 하는 ‘청소년 보호 책임자’(정보통신망의 청소년 유해정보 차단·관리와 청소년 보호 계획 수립 담당)도 하루 평균 이용자가 10만 명 이상이거나, 연매출액이 10억원 이상 사업자에 해당해 소규모 사업자는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랜덤채팅 앱을 만드는 데 3천만원가량 든다고 한다. 그렇게 난립한 랜덤채팅 앱이 영세사업자라는 이유로 단속하기 어렵다면, 정부가 필터링 엔진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업체에 보급해 운영하도록 하고, 정부가 감시하면 된다”고 했다.
랜덤채팅 앱을 규제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스마트폰 보급 초기부터 꾸준히 있었다. 2012년 이노근 의원(새누리당)이 대표 발의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선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에게 본인 인증 조처를 하도록 하고, 청소년 성매매 암시·유발 정보를 발견했을 때 삭제 또는 전송 중지하는 의무를 규정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터넷기업협회에서 ‘과잉 입법’이라며 반대해 폐기됐다.
8년 전 ‘앱 자체가 유해하지 않다’
당시 여가부도 “앱 자체가 유해한 것이 아니라 앱에서 이뤄지는 조건만남이 유해한 것”이라는 업체들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터지고 뒤늦게 여가부는 ‘랜덤채팅 앱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 관련 고시안을 냈다. 여기엔 △실명 인증이나 휴대전화 인증을 하지 않고 △대화 저장 기능이 없으며 △신고 기능이 없는 앱은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여가부는 이 고시안을 올 하반기에 발령하고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문제 제기 뒤 8년 만이다.
장수경 기자 flying7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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