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려고 별짓을 다 했다. 방송사 회원 가입한 뒤 이용료 내고 이제 보려는데 19금 시청에 걸려서 재생이 안 됐다. 성인인증이 필요했다. 결국 한국 휴대전화 정지를 풀고 인증번호를 받아 들어갔다. 주말마다 영국과 한국의 통신사 유심카드를 바꿔 끼워가며 봤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부부의 세계’가 너무 궁금했다. 그런데 끝나고 나니 ‘엄마의 세계’가 더 기억에 남는다.
‘성범죄’에서 보호 vs ‘성’에서 보호
엄마 지선우는,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중학생 아들 준영의 일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아들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문제를 감지하고 준영이 불안해할 때마다 지선우는 설명해주는 대신 “아무 일도 아니야,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오늘 학원 가는 것 잊지 마”라고 말하며 아무 일도 없는 양, 아들의 일상을 챙겼다. 지선우는 이혼을 앞두고 심란해서 혼자 울다가도 2층 아들 방에 올라갈 때는 표정과 목소리를 평안하게 하고 아침 인사를 했다. “아들, 오늘 영어듣기 평가 있다며. 지난번에는 딴생각하다가 하나 틀렸잖아. 오늘은 실수하지 말자. 내려와서 아침 먹어.” 지선우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니 지금 뭣이 중헌디!
영국 방송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것이라고 해서 <닥터 포스터>를 찾아봤다. 영국 엄마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궁금했다. 두 드라마의 디테일(세부 표현)은 많이 달랐다. 엄마가 아들을 대하는 방식도, 아들의 일탈 모습도, 그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도, 심지어 이혼 뒤 엄마의 성을 다루는 방식도 차이가 있었다. 성적 표현 수위가 훨씬 높은 <닥터 포스터>의 시청 연령은 15살이다. <부부의 세계>가 19금인 것은 18살 이하 청소년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일 거다.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어른의 세계, 특히 성적 문제로부터 격리하고 싶어 한다. 가정과 학교에서 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마치 청소년이 성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을 가장 좋은 상태로 보는 듯하다. 그건 위험한 일이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성은, 한편에선 무지하거나 억압된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는 왜곡되고 폭력적인 형태로 이들을 위협한다.
정자포자설, 한 이불을 덮으면 임신한다?
폭력적인 형태의 위협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충격이 너무 커서 정부는 서둘러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를 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형법 제297조) 처벌 기준 연령이 13살 미만에서 16살 미만으로 상향됐다(2020년 5월19일 시행). 이 뉴스를 보고, 이제까지 우리가 허용했던 일에 기겁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인이 13살 어린이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면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로 처벌하지 않았던 거다. (영국에선 성인이 16살 미만 아동을 성적 목적으로 만나려고 시도만 해도 징역형이다.)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도 개정됐다. 이제 성착취물을 소지, 운반, 광고, 소개, 배포, 제공, 시청하면 다들 징역형을 살게 되었다(2020년 6월2일 시행). 청소년을 성범죄로부터 보호하는 장치가 정비되는 것은 다행이다. 그럼 이제 충분한가? 나는 이제야말로 본격적으로 성교육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을 성범죄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건강한 ‘성’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일찌감치(3월25일), n번방 피해자와 가입자에 학생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며, 교육부가 여성가족부와 함께 청소년에게 ‘성인지 감수성’ 교육 강화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과연 교육부와 여성가족부가 잘할 수 있을까? 꼰대처럼 19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까? 모호하게 돌려 말해서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초등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던 우리 아이는 남녀가 함께 이불을 덮으면 하트가 퍼진 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한 이불을 덮으면 정자가 포자처럼 퍼져 임신이 되는 ‘정자포자설’을 생각해냈다. 분명하지 않게 다루면 아이들은 아무거나 상상한다.
2020년 9월부터 영국의 모든 초등학교에는 ‘관계맺기’(Relationships) 과목이, 중등학교에는 ‘관계맺기와 성’(Relationships and Sex) 과목이 필수교과가 된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학교에서 PSHE(Personal Social Health Education·개인적 사회적 건강교육)라는 과목의 일부로 성교육을 했다. 우리 아이들도 14살 때쯤 배웠다. 아이들이 얘기해준 성교육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우선 건강한 인간관계를 다루고, 건강하지 않은 관계, 즉 성적 모욕, 착취, 학대, 그리고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의 위험을 배웠다. 성평등(양성평등이 아니다) 관점에서 미디어를 분석했다.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배우고 토론했다. 성관계에 대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다양한 피임법, 성병(STD)의 종류와 예방법 등을 배웠다. 모든 학생이 콘돔 사용법을 실습했다. ‘C(Condom)카드’가 있다는 것도 아이들한테 들었다. 이 카드를 가진 25살 이하 젊은이는 누구나 학교 보건실과 지역 클리닉에서 콘돔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단다. 지역 성건강 클리닉(Sex Health Clinic)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이용하는지도 알려줬다. (영국에는 지역마다 성건강 클리닉이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검사가 익명으로 이뤄진다. 미성년이라 하더라도 부모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래야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학교에도 클리닉 간호사가 와서 특강을 했다.
아이 둘을 낳고도 성에 무지하다니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니, 나이 오십이 되고 아이 둘을 낳고서도 내가 성에 무지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아이들이 나보다 성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든든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의 남자친구도 이런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새삼 안심됐다.
엄마들은 걱정이 많다. 세상이 흉흉해서 걱정이다. 아이들이 성에 대해 빨리 눈뜰까봐도 걱정한다. 흉흉한 세상은 법으로 다스리자. (n번방이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줬다.) 그리고 건강한 성을 제대로 가르치자. (교육부와 여성가족부를 한번 믿어본다.) 외면하고 금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아이들은 19살 생일에, 갑자기 성에 눈뜨는 것도, 책임 있는 태도를 저절로 아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잘 이해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요즘 우리는 (성적 표현) 수위가 높은 영화도 같이 본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큰 기쁨이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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