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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합시다”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합시다”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등록 2020-04-29 10:25 수정 2020-06-27 03:33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세 시간 정도 온라인 강의를 하고 나면 나는 탈진한다. 문자 그대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 좀비처럼 방바닥에 널브러져 눈 감고 있노라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수업은 어디로 가고 있나, 급기야 수업이란 무엇이고 강사란 뭐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까지. 체력은 원래 별로였지만, 이 정도까지 지쳐버리는 건 분명 ‘온라인 강의’이기 때문이다.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합시다”라는 말을 들으면 대체로 부담스럽다. 여럿이 어울리는 자리는 되도록 안 가고 싶고, 전화보다 문자나 이메일을 선호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대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전환된 지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금, 나는 만나서 얼굴 보며 수업하고 싶어 애가 타고 안달이 난다.

‘음소거’와 함께 사라지는 것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아니라 ‘물리적 거리 두기’로 고쳐 쓰자는 제안이 있었다.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라는 슬로건도 본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물리적인 몸의 가까움 없이 ‘사회’나 ‘관계’가 가능한지 의심하는 중이다.

실시간 온라인 강의는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강사를 뺀 모든 학생은 ‘음소거’ 상태로 진행된다. 온라인 강의가 괴로운 이유는, 이때 소음만 ‘소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선 이동, 바스락거림과 소곤거림, 앞으로 혹은 뒤로 기울어지는 상체, ‘와~’ 하는 웃음이나 동시에 내뱉는 한숨으로 공유되는 어떤 느낌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물질적 관계성의 감각이, ‘음소거’와 함께 사라진다.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바로 그 조건이 내 말의 내용과 방향을 변형한다. 그러나 누구든 언제나 연결될 수 있다면, 굳이 당신일 필요도 없고 꼭 지금이어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 내가 하는 온라인 강의가 (재미없는) ‘유튜브 채널’이나 (시청률 낮은) ‘쇼프로그램’과 진정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육 ‘소비자’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식 엔터테이너’가 되지는 말자고 다짐해온 세월이 일거에 무색해지려 한다.

온라인 수업의 필요성과 장점을 부정하는 게 절대 아니다. 그러나 면대면이 온라인으로 ‘대체’된다는 말은 부정확하며, 이를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 양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물론 면대면은 부담스럽고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부담감과 ‘비효율’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한 소중하다. 방 안에 앉아 북한산의 사계절을 고해상도 파노라마사진으로 볼 수 있어도, 사람들은 주말 시간을 쪼개 직접 북한산에 오르는 ‘비효율’을 감행한다. 번거롭게 먼 거리를 이동해 굳이 친구를 만나러 간다. 시간과 거리를 단축하는 기술은 편리하지만 이때 ‘단축’되는 게 시공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필요한 ‘비효율’들

‘용건만 간단히’로 이루어진 관계를 친구라고 느낄 사람은 없다. 어색함을 참고 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보는 경험, 불편해도 다음주에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하려는 노력, 머뭇거리거나 오락가락하는 서로를 좀 견디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정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모든 ‘깔끔하고 매끄럽’지 않은 것이 타인을 살아 있는 존재로 감각하게 한다. 지지부진과 소란함 없이 작동하는 민주주의란 없다.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달라질 거라고들 한다. 그러나 ‘~ 이후 세계는 달라질 것’이라 말했던 재난은 많았다. 사회변화는 저절로 오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을 대규모로 경험하는 이 시기를 보내며,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바꾸려고, 혹은 지키려고 애써야 할까.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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