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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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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북한 관료 왜 “죽었다” 쓸까?

<조선일보> 김영철 노역형 오보 등 확인 안 된 ‘받아쓰기’ 탓

북에 대한 정보 부족·편견과 국내 정치 악용 영향도
등록 2019-06-08 13:31 수정 2020-05-03 04:29
(위부터) 2016년 2월10일 통일부가 배포한 리영길 숙청설 문건. ‘김영철 노역형’ 보도 〈조선일보〉 기사 갈무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바라보며 박수치는 맨 앞줄 배석자들 사이에 최근 “강제 노역설”이 나왔던 김영철(흰색 원) 노동당 부위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통일부 제공,〈조선일보〉 갈무리, 연합뉴스

(위부터) 2016년 2월10일 통일부가 배포한 리영길 숙청설 문건. ‘김영철 노역형’ 보도 〈조선일보〉 기사 갈무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바라보며 박수치는 맨 앞줄 배석자들 사이에 최근 “강제 노역설”이 나왔던 김영철(흰색 원) 노동당 부위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통일부 제공,〈조선일보〉 갈무리, 연합뉴스

‘크렘리놀로지’(Kremlinology)란 말이 있다. 미국과 소련이 맞섰던 냉전 시기에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나오는 믿을 만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당시 소련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 정부 관료 등은 소련 공산당 기관지 기사를 줄 치며 읽었다. 기사 문장 사이사이 행간에 숨은 의미까지 유추해 소련 지도부의 의중을 읽으려고 했다. 기사, 사진에 나타난 공식 행사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의 이름, 호칭 순서, 자리 배치 등을 세밀히 분석했다. 이를 통해 소련 공산당 내 권력관계, 서열, 정책 변화를 판단, 예측했다. 소련 국경일에 벌어지는 군사 행진 때 나온 무기를 바탕으로 군사 기술 수준, 장비 배치 현황을 추측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이 1981년에 받은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체코의 군사제도가 자국의 정치·사회에 미친 영향 분석’이었다. 선행 연구도 자료도 없는 분야에서 그는 자료 조사를 위해 7주간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라이스는 군사기밀인 소련 전략방어사령부 근무자 규모를 알고 싶었다. 그는 사령부 청사의 창문 수를 헤아려 전체 근무 인원을 5천 명쯤으로 추산했다. 냉전이 끝난 뒤 밝혀진 실제 사령부 근무자는 5천 명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북 내부 소식은 ‘확인 불가’ 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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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맞추기나 암호 풀이와 비슷했던 냉전 시기 소련 연구 방법을 권력의 핵심인 모스크바 크렘린궁전에서 따와 크렘리놀로지라고 했다. 현재 북한 연구도 크렘리놀로지와 같다. 국내외 북한 연구자와 정부 당국자 등은 기사 행간의 의미를 읽고, 북한 주요 행사 참가자의 사진과 명단을 분석한다.

남북관계 취재를 맡은 기자들은 정보가 없거나 부족해 힘들다. 북한은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고 북한 당국자와 통화하거나 전자우편을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등 공식 자료와 정부 당국자, 탈북자, 재중동포, 외교관, 대북 교류협력 사업자 등이 북한 취재의 원재료다. 북한 공식 매체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한계가 있다. 정부 당국은 믿을 만한 북한 정보를 갖고 있지만 정보를 선별 가공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탈북자, 북한과 교류협력 사업을 하는 민간단체, 대북 지원단체 등에서 북한 내부 소식이 나온다. 이 소식이 구체적이고 생생하지만 사실 확인이 미흡한 전언에 머무는 경우가 있다. 또 일부 지역에 국한된 사실이라 북한 현실의 전체 얼개를 그리는 데 한계가 있다.

현장과 당사자를 직접 취재하지 못하니 북한 관련 보도는 허술해지기 쉽다. 북한 관련 보도에서 사실 확인이란 저널리즘의 기본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 가 노역형을 보도했던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북한 공개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는 ‘북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김영철 부위원장이 강제 노역 등 혁명화 조치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5월31일치에 보도했다.

그동안 의 북한 오보들을 보면 “김영철 숙청” 오보는 점잖은 편이다. `“죽었다”고 했으나 살아난 사람이 여럿이다. 1986년 11월 김일성 주석 사망설, 2013년 8월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 총살설, 2016년 2월 리영길 북한군 총참모장(국군 합동참모의장에 해당) 처형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 오보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1970년대 초·중반에는 김일성 주석 후계자를 놓고 숱한 오보를 냈다. 1974년 2월16일치 는 ‘김일성 후계로 부각, 김영주 북괴 정무원 부총리 선임’이란 기사를 실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1974년 북한 내부적으로 후계자 위치를 확보했고, 1980년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됐다.

1990년대 중·후반 김일성 주석 사후에는 북한 오보가 쏟아졌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뒤 김정일 건강 악화설, 김정일 이복동생 김평일 망명설, 평양 주민 100만 명 강제이주설 등 미확인 보도가 난무했다. 이런 보도를 바탕으로 북한 내부에 엄청난 혼란이 생겨 머잖아 북한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됐다. 일부 언론과 전문가는 `김일성 사후 3개월 내 북한 붕괴설’을 주장했다가, 3개월이 지나도 북한이 망하지 않자 6개월설이 나왔고, 6개월이 지나자 1년설이 또 나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김일성 주석 사망 뒤엔 ‘북한 붕괴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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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오보의 원인과 배경은 5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북한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다. 북한 정부는 남한 정부처럼 주요 직책 인사이동, 주요 정책 브리핑 등을 거의 하지 않는다. 북한 당국이 등에서 공개한 정보만으로는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시민사회단체가 없고, 북한 주민들의 사회관계망 활동도 전무하니 북한 주민들의 생각을 날것으로 들을 기회가 없다.

둘째, 북한에 대한 편견이다. 상당수 오보는 북한을 악마나 범죄집단이란 전제를 깔고 있다. 북한이 ‘비정상적인 깡패국가’이기 때문에 망해야 한다고 여긴다. 북한 오보가 권력 암투, 주요 인사 처형·숙청설, 쿠데타설, 주요 인사 망명설에 집중된 것은 북한 내부 혼란과 붕괴 가능성을 염두에 둔 ‘희망적 사고’가 작용한 것이다.

셋째, 북한 정보를 국내 정치에 악용하려는 한국 정부가 오보를 부추긴다. 믿을 만한 북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들은 청와대, 국가정보원, 통일부, 국방부 같은 정부 당국의 설명이나 제공된 자료를 공식 ‘확인된 사실’로 받아들인다. 정부가 이런 신뢰를 악용해 ‘잘못된 정보’를 언론에 흘리기도 한다.

2016년 2월10일 오전 11시48분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최종 결정하고 언론에 발표하겠다고 알렸다. 3시간 뒤인 그날 오후 3시께 통일부는 ‘북한, 군총참모장 이영길을 2월 초 전격 숙청’이라는 제목의 피디에프(PDF) 문건을 출입기자들에게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문건의 요지는 “북한은 2월 초 군총참모장인 이영길(61세, 대장)을 ‘종파분자’ 및 ‘세도·비리’ 혐의로 처형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통일부는 보도할 때 ‘대북 소식통으로 인용’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대북 소식통의 실체는 국가정보원이었다. 이 문건은 국가정보원이 만들고 통일부가 기자들에게 뿌려 공개됐다. 당시 ‘리영길 처형’은 대부분 언론이 ‘김정은 공포정치’의 본보기로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석 달 뒤인 2016년 5월10일 은 리영길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1차 전원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과 정치국 후보위원에 뽑힌 사실을 보도했다.

‘리영길 처형’이 오보로 밝혀지자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개성공단 폐쇄 뒤 악화될 여론을 ‘포악한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을 확대재생산함으로써 물타기했다는 것이다. 마저 “만약 개성공단 철수 분위기 조성용으로 리영길 처형을 공개한 것이라면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다”(2016년 5월11일치 사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당시 정부 당국이 ‘리영길 처형’을 발표한 시점과 발표 방식에 대한 `합리적 의심 없이 정부 발표 `받아쓰기에 그친 언론의 책임도 무겁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면책특권 악용한 ‘아무 말 대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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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북한 보도에는 사실상 면책특권이 있다. 오보가 나와도 북한이 공식 항의하거나 손해배상이나 명예훼손 등 민형사 소송을 걸지 않는다. 기자들은 양쪽의 주장과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기사를 쓸 때는 사실관계를 최대한 확인하고, 반드시 양쪽의 입장을 모두 듣는다. 특히 기사에는 비판받는 쪽의 반론이나 해명을 반드시 반영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고소와 고발 등 각종 민형사상 소송에 시달리게 된다.

기자들이 북한 보도에는 이런 취재보도 원칙을 잘 지키지 않는다. 북한과 관련해서는 사실관계와 추정·편견이 뒤섞인 기사를 내보내더라도 북한에 있는 당사자가 남한 언론중재위원회나 법원에 반론보도나 정정보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오보를 정정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 북한 보도는 면책특권을 누리는 셈이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일부 언론은 `사실 확인이란 저널리즘의 기본을 지키지 않고 소문이나 추측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곤 한다.

다섯째, 자극적인 북한 보도로 시청률과 온라인 기사 페이지뷰를 올릴 수 있다. 일부 인터넷 뉴스와 종합편성채널을 보면 북한을 선정적으로 다루고 조롱거리로 삼는다. 종편의 경우 전문성이 떨어지는 패널들이 김정은 위원장의 사생활, 권력암투설 등을 놓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아무 말 대잔치를 펼쳐도 시청률이 높게 나온다고 한다. 북한 조롱하기, 윽박지르기, 편가르기에 몰입하는 보도가 해당 언론사에는 `남는 장사이기에 이들은 좌판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는다.

최근 논란이 된 의 ‘김영철 노역형’ 보도가 오보로 드러나면서, 북한 당국을 돕는 결과를 낳고 있다. 기사에서 언급한 김영철 외 다른 북한 인사들의 숙청·처형설에도 의구심을 제기하면서, 일부에서는 ‘김정은 공포정치’가 정말 있느냐고 묻는다.

‘김영철 노역형’과는 별개로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개인 절대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숙청과 공포정치에 의존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북한 지도부가 지금까지 중요 간부들을 처형할 때는 거의 항상 강건종합군관학교를 이용해왔고, 북한 지도부는 처형할 간부와 관련 있는 부문의 인사들을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 모아놓고 그 앞에서 본보기로 처형을 집행하기 때문에 처형이 있으면 그 정보는 휴민트(정보원)를 통해 보통 수주 내에 우리 당국에까지 들어오게 된다.”(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

<font size="4"><font color="#008ABD">‘확인되면 쓴다’ 수습 매뉴얼이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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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를 피하고 북한 보도를 정확하게 하려면 기자의 전문성이 높아야 한다. 특정 취재원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종합적 정세의 맥락에서 기사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특정 취재원에게 의존하지 말고 여러 취재원에게 교차 확인해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 따져봐야 한다. 이 과정이 시간이 걸리고 어려우면 북한 오보를 피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실 확인이 되면 쓴다’는 언론사 수습기자 때 배운 취재보도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면 된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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