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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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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피 집어삼킨 제국의 시대

종전 뒤 조선 귀향 기다리는 근로정신대 소녀들…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없는 제국은 ‘현재진행형’
등록 2018-01-23 17:11 수정 2020-05-03 04:28
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에 모인 소녀들. 사진 설명에 따르면, 전시노동을 위해 일본에 온 소녀들의 나이는 8∼14살이었다. 이 사진은 일본에서 간행된 사진집 등으로 알려졌으나, 출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다. 미 육군 통신대가 하카타(후쿠오카)에서 1945년 10월19일 찍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에 모인 소녀들. 사진 설명에 따르면, 전시노동을 위해 일본에 온 소녀들의 나이는 8∼14살이었다. 이 사진은 일본에서 간행된 사진집 등으로 알려졌으나, 출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다. 미 육군 통신대가 하카타(후쿠오카)에서 1945년 10월19일 찍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영국·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와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후진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벌어진 영토전쟁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남서태평양 지역과 아시아를 전쟁의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 일본이 석유·고무 등의 자원을 얻으려 동남아시아 지역을 공격하자,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은 즉각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영국은 인도와 버마(미얀마)에서 기득권을 가졌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는 동인도제도, 미국은 필리핀을 각각 식민지로 두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조선 소녀까지 전쟁터 내몬 일본</font></font>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뒤늦게 합류했지만, 가장 광활한 영토를 점령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에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질타했지만, 일본이 침략한 영토는 ‘제3제국’이라던 독일과는 비교되지 않았고 식민지 영토가 너무 많아 해가 지지 않을 정도라는 영국보다 훨씬 더 컸다. 북쪽 만주부터 남쪽 뉴기니에 이르는 영토는 북미 대륙보다 넓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전쟁은 군인들만이 싸우는 전쟁이 아니었다. 국가의 경제력, 문화적 힘 그리고 국민이라는 ‘인적자원’이 동원되는 ‘총력전’이었다.

‘영토적 제국’을 확대하고 유지하려면 인력이 필요했다. 최대 500만~600만명의 군인을 전선에 동원한 일본은 기지 건설과 전쟁 무기 생산을 위해 식민지 인민을 대규모로 징발했다. 조선에서 이루어진 강제 동원은 노무원과 군인,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 일본은 조선인을 각종 산업현장에 노무원으로 동원하는 한편, 지원병제·징병제·학도지원병제 등을 실시해 청년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여성은 ‘근로정신대’ 혹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했다. ‘근로정신대’는 주로 군수공장 같은 산업시설에서 생산노동에 종사하고, ‘위안부’는 일본 군인에게 성적 봉사를 강요받았다.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인력과 물자를 본격적으로 수탈했다. 여성 동원은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지만 그 전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젊은 남성이 전장에 동원됐기에, 후방의 생산은 여성 노동력이 맡아야 했다. 여자정신근로령은 12살 이상 40살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모집 대상이었지만, 실제로는 더 나이 어린 소녀까지 동원됐다. 가난에 시달리던 식민지 소녀들은 일본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공장에 취직하면 돈을 벌 수도 있고 학교까지 보내주니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는 꾐에 빠져, 주로 초등학교 고학년의 소녀들이 정신대에 들어갔다. 소녀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군용항공기 공장이나 후지코시 철재공업주식회사, 조선소 등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데 동원됐다.

첫 번째 사진을 보자.(사진①) 전쟁이 끝난 뒤, 조선으로 귀향을 기다리는 여자근로정신대 소녀 200여 명이 한곳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 휘장에는 ‘귀환 전라북도 여자근로정신대’라고 쓰여 있다. 소녀들 중간에 박힌 남성 10여 명은 소녀들을 감독하는 사람들이었다. 잠잘 때, 밥 먹을 때, 일할 때 항상 감시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찍은 사진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소녀들 속에 섞여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공부 시켜준다는 꼬임에 속아</font></font>

소녀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등학생 소녀 정도 돼 보이는 왜소한 얼굴도 여럿 보인다. 미 해군이 작성한 사진 설명에는 소녀들의 나이가 최소 8살, 많아도 14살이라고 밝혔다.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이 완전 거짓임을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할당량을 채워야만 일이 끝났고 군대식 점호가 이루어졌다. 아이들이 일하기에는 작업대가 너무 높아, 기계 앞 나무 받침을 디디고 올라서야 했다. 어린아이가 견딜 수 없는 가혹한 노동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이 지역에 자원 약탈을 위한 농장과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수만 명의 조선인을 남태평양제도로 이주시켰다. 남태평양의 마셜제도에 속한 밀리환초(Mili Atoll)는 지도로 확인하지 않으면 어디쯤 있는지 모르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이다.

미군은 일본군이 점령했던 지역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로 향하는 과정에서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는 섬만을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고립시키거나 봉쇄해버렸다. 도서 지역 모두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개구리 뛰기’(leapfrog) 작전 때문에, 마셜제도 내 밀리환초는 일본 패전 때까지도 미군이 점령하지 않은 상태였다. 해군 함정으로 주변을 봉쇄하고, 간간이 소규모 전투를 하는 정도였다. 고립된 밀리환초 주둔 일본군은 극심한 식량난에 빠졌다. 먹을 것이 완전히 없어진 상황에서 조선인을 죽이고 식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1945년 3월(3월17일로 추정), 태평양 중서부 마셜제도의 동남쪽 끝 밀리환초에 일본군이 강제징용으로 끌고 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밀리환초 치루본섬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던 일본인들을 죽이고 미군에 투항할 계획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날, 일본 토벌대가 다른 섬에서 건너와 반란을 일으킨 조선인 노동자들을 집단 학살했다.

육군 소좌(소령) 후루키 히데사쿠는 전쟁이 끝난 뒤 전범으로 기소됐다. 그에 대한 조사서와 탄원서에는 당시 밀리환초에서 일어난 일이 상세히 적혔다. 일본군의 마지막 보급선이 미군에 의해 침몰된 1944년 10월 이후 마셜제도 내 주요 기지들이 극심한 기아 상황에 놓였고, 다달이 200명가량 굶어 죽었다고 한다. 군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 200∼300m를 걷지 못했고, 다들 기진맥진해 누워만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주검을 먹었고, 인육을 먹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생지옥과 같은 상황이었다.

맨 처음 식인은 일본 군인에게서 시작됐다. 식량이 떨어졌음에도 영양 상태가 좋은 몇몇 군인이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한 장교가 다그쳐 물으니 식인을 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식인을 한 군인들은 군법에 따라 처벌됐다고 일본군 장교는 진술했지만, 처벌로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식인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식인은 밀리환초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타로아섬에서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땅에 묻힌 주검을 파내어 먹는가 하면, 살아 있는 사람조차 죽여 식량으로 이용했다. 일본군이 고립된 뉴기니 등지에서도 광범위하게 식인 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이 전쟁 뒤 일본 사회에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굶어 죽거나, 잡아먹히거나</font></font>
② 마셜제도의 밀리환초에서 탈출하는 조선인 노동자들. 미 해군이 찍었다(왼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② 마셜제도의 밀리환초에서 탈출하는 조선인 노동자들. 미 해군이 찍었다(왼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③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한 조선인 노동자들. 남태평양에 끌려간 노동자들은 기아에 허덕였고, 섬에 고립된 일본군은 인육까지 먹으며 저항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③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한 조선인 노동자들. 남태평양에 끌려간 노동자들은 기아에 허덕였고, 섬에 고립된 일본군은 인육까지 먹으며 저항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일본인들이 고래고기라며 조선인에게 먹인 고기가 동료들의 인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패전 직전 극도의 생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던 일본군은 약자인 조선인에게 살해와 식인 위협을 가했다. 굶어 죽거나 잡아먹히는 극단적 상황에 놓였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미군에 투항하려 했다.

일본 쪽 자료에는 밀리환초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를 군무원으로 분류해 이들을 일정한 대우와 임금을 보장받는 사람들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군의 구조 사진(사진②③)에서 확인되듯,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려 피골이 상접한 비참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군은 조선인 노동자를 ‘노예노동자’(Slave Laborers)로 판단했다. 1944년에 제작된 미군의 마셜제도 동영상 필름에 조선인 징용자가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조선인 징용자를 ‘조선인 노예노동’(Korean Slavery Labor)로 지칭했다.

미 해군이 찍은 사진 11장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섬을 탈출해 1945년 3월18일 미군에 구조되는 상황을 담았다. 이 사진들은 미군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조하는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보여준다. 사진 설명에는 조선인 노동자 193명이 일본(군)의 노예 생활에 반발해 반란(Revolt)을 일으켰고, 미 해군이 68명의 생존자를 구조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이는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반란 사건이 실제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사진 기록이었다.

미 해군이 구조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뒤, 1946년 1월 일본 요코스카시 근처 우라가(浦賀)에 머물다, 다음달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자근로정신대에 끌려간 소녀들 역시 1945년 말에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죄와 반성 없는 제국</font></font>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 있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이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철이는 은하철도를 타고 긴 여정을 거쳐 프로메슘이 지배하는 기계제국에 도착한다. 기계로 탈바꿈한 기계제국의 인간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철이는 기계제국에 가려 한 것이다. 하지만 기계인간은 생명 자체의 존엄성과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존재다. 기계제국은 철이의 피를 요구한다. 소년의 젊은 피가 기계제국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실제의 제국은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더 많은 젊은 피를 요구했고, 집어삼켰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없는 제국의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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