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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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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35만원, 첫 번째 기본소득 주인공이 뽑혔다

하루 12시간 근무하는 25살 임지은씨, 무작위로 뽑혀

기본소득 실험은 그의 삶을 정말로 바꿀까
등록 2016-12-06 11:26 수정 2020-05-02 19:28
11월27일 기본소득 첫 번째 주인공을 추첨하는 행사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왼쪽)이 1등을 뽑고 있다. 김진수 기자

11월27일 기본소득 첫 번째 주인공을 추첨하는 행사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왼쪽)이 1등을 뽑고 있다. 김진수 기자

“원래 첨단 디지털 방식으로 추첨하려 했으나 사전 조작 논란이 있을 수 있어서… 여러 방법을 검증한 끝에… 가장 정통한 방식인 탁구공 뽑기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한 달 135만원의 기본소득을 받을 주인공을 뽑는 순간, 행사 사회를 맡은 안수찬 편집장의 농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묘한 긴장감도 느껴졌다. 투명한 아크릴 상자에 든 탁구공 206개에는 기본소득에 응모한 이들이 각각 부여받은 번호가 1번에서 206번까지 쓰여 있었다. 여기서 번호가 뽑히면 한 달에 135만원, 총 810만원을 받게 된다. 이 돈을 어떻게 쓰는지는 자유!

기본소득과 박근혜 게이트는?

이날 행사에 참여한 이재명 성남시장이 상자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고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노란색 탁구공 하나를 집어들어 번호를 불렀다. 148번. 경기도에 사는 25살 여성 임지은씨가 주인공이었다.

아쉽게도 임씨는 이날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여러 상황상 1등이 기본소득을 받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2등 당첨자를 뽑았다. 10번 강요셉씨가 호명되자 강씨 주변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강씨는 ‘기본소득을 받게 됐다 치고’ 소감을 밝혔다. “누가 받든 박수 쳐주고 격려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씨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중에 당첨 소식을 전해들은 임지은씨는 기본소득을 수령하기로 했다. 대학원생인 임씨는 응모지원서에 “학생이라기엔 늦은 나이라 부모님께 용돈 받기도 죄송하고 알바를 하고는 있지만 너무 빠듯한 상황이다. 이제는 취업 준비도 해야 하는데 기본소득이 너무 절실히 필요하다”고 썼다. 그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12시간을 학교 실험실에서 근무한다. 이제 임씨에게는 한 달에 135만원을 쓸 기회가 생겼다.

이번 프로젝트는 이 ‘카카오 스토리펀딩’을 통해 모은 1천만원으로 ‘기본소득 실험’을 하기 위해 기획됐다. 기본소득 받을 주인공을 무작위로 뽑고 이 주인공이 6개월 동안 어떤 삶을 사는지, 기본소득으로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라가보면서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알리자는 취지다. 은 앞으로 임지은씨의 삶을 조금씩 따라가며 그 변화를 소개할 예정이다.

주인공을 뽑은 11월27일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는 일요일 저녁임에도 기본소득 스토리펀딩 투자자와 응모자들 50여 명이 참석했다. 첫 번째 추첨 대상자가 18~34살 청년이어서인지 관객석에는 20~30대 젊은이가 많았다. 페이스북으로 생중계된 행사 영상은 도달 수 32만4천여 명, 공감 및 댓글, 공유 수가 5681건에 달하는 등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1등 뽑기’ 직전에는 기본소득과 관련해 꾸준히 활동해온 이재명 성남시장과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패널로 참석해 기본소득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의견을 나눴다.

이들에게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은 ‘박근혜 게이트’라는 현 시국에서 촛불 시민들의 열정과 분노 등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기본소득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였다. 이 질문에 세 패널은 모두 ‘박근혜 게이트’의 원인이 된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이후 시대’에 필요한 핵심적인 정치 의제가 기본소득이란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하승수 대표는 “기본소득이 도입된 세상이라면 ‘박근혜 게이트’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시국에도) 광장에 나오고 싶지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나올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경제적 시민권이 확보되지 않으면 정치적 참여 기회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러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 지경이다. 최소한의 먹고살 수 있는 권리인 경제적 시민권을 갖게 해주는 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박근혜 이후의 유력한 대안은 기본소득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최저임금과 기본소득”
(맨 왼쪽부터)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의 사회로 기본소득과 관련해 꾸준히 활동해온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이재명 성남시장,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기본소득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맨 왼쪽부터)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의 사회로 기본소득과 관련해 꾸준히 활동해온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이재명 성남시장,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기본소득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이승윤 교수는 “박근혜 정권 이후를 상상하는 데 있어서 기본소득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꿈꾸는 사회를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더 진취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소득 보장’은 타인의 인정(노동을 통한 가격매김)과 무관하게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시장도 ‘박근혜 게이트’에서 드러난 정경유착을 기본소득을 통해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나빠진 원인으로 “자원이나 기회는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을 특정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독점화했다”는 점을 짚고, “결국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기는 근본적 한계, 모순을 보완하기 위한 제3의 보완 대책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본소득이 실현되기 위해 사회 각 분야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짚었다. 이 시장은 “정치권은 세금을 국민한테 많이 주면 ‘버릇이 나빠진다, 나태해진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기본소득이 국가의 의무라는 사실을 정치권에서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승수 대표는 “(노동운동이) 최저임금과 기본소득 두 축으로 가야 한다. 일자리가 줄고 노동 여건도 열악해지고 있는데 노동자들은 파업도 할 수 없다. 파업 기간이 장기화되면 저임금 노동자들은 신용불량자로 내몰린다. 노동자들이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최저임금도 올리고 동시에 기본소득도 받아야 한다. 시민사회가 이런 철학적 기반을 공유하고 정치권에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열띤 논의 속에 관객의 질문도 쏟아졌다. 가장 많은 질문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 위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문제였다. 세 패널 모두 우선적으로 조세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시장은 “(선택적) 복지 지출에는 전달 비용이 많이 든다. 누가 하위 70%에 들어가는지 조사하고 계속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그런 간접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또 성남시에서 시행하는 청년배당, 무상교육, 무상보육 등의 정책을 전국 단위로 확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남시 정책을) 정부 전체로 확대하는 데 5조원밖에 안 든다. 국가 전체 예산 400조원 중에서 2.2%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추가 기본소득 시행을 위해 법인세를 올릴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승윤 교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으로 우리나라 복지 지출은 최하위권이다. 일본의 절반 이하다. 결국 재산세를 통해 추가 재원을 확보해 재분배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기본소득이 도입되려면 사회 서비스의 질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컨대 전반적인 보육 서비스의 질이 낮은 상황이라면, 재산이 많은 사람은 기본소득으로 훨씬 더 좋은 보육 시설에 아이를 맡길 수 있겠지만 재산이 없는 사람은 기본소득을 다른 데 써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질 낮은 보육 시설에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는 ‘차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기본소득을 단계적으로 도입할 때 어떤 정책과 정합성을 가지고 발전시켜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이 우선인가?”

여러 질문 가운데 눈에 띄는 것도 있었다.

“북유럽 등 기존 복지국가에서는 단계적으로 노동복지, 교육복지가 해결되고 나서 기본소득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최저임금, 장시간 근로, 비정규직 등의 노동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됐을 때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현재 한국의 열악한 노동 상황 때문에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기본소득 도입이 더 시급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이승윤 교수는 “중요한 지점은 한국 노동시장 상황이 상당히 급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지국가가 처음 설계됐을 때 남성 임금 노동자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빨리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표준적 고용근로가 해체돼 근로기준법에서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어쩌면 한국이 가장 먼저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승수 대표도 “북유럽 복지국가가 만들어질 때의 시기와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다. 덴마크, 스웨덴 등 노조 조직률이 50%가 넘는 나라들에선 노조가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노조 조직률은 10.3%로 노조가 협상력이 없다. 열악한 조건의 노동은 안 할 수도 있는 권리가 있어야 협상력을 가진다. 기본소득을 받음으로써 노동자가 열악한 노동을 거부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이재명 시장은 현 시국을 차별과 불평등의 시대라고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본소득을 역설했다.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이념적 가치가 평등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교육 기회의 공평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교육받을 기회를 제대로 보장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처럼 차별과 불평등이 심할수록 기본소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1세기는 기본소득의 시대”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 이미 시행하고 있는 청년수당이나 노인기초연금 등과 중첩되기 때문에 생기는 마찰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이에 대해 패널들은 수당 형태의 여러 복지 정책은 기본소득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을 확대하는 단계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국민 모두가 ‘박근혜 이후’를 고민하는 요즘, 이것의 강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가 ‘기본소득’이 될 수도 있음을 이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다. 하승수 대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19세기는 노예제 폐지, 20세기는 보통선거권, 21세기는 기본소득의 시대라는 말이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기본소득이 꼭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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