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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는 공영방송의 해악

이주의 키워드/MBC 녹취록
등록 2016-02-02 22:59 수정 2020-05-03 04:28

우리의 냉소적 인식은 어떤 진실을 새로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진실이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어떤 진실이 자기 지위를 재확인할 때에 강화된다.

이제 이러한 냉소의 소재가 되는 가장 정확한 사례로 MBC를 들 수 있게 됐다. 이명박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프로젝트 이후 어떤 사람들이 MBC를 좌지우지하게 됐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그런 사람들이 방송을 어떻게 망쳐왔는지도 꾸준히 비판해왔다. MBC 뉴스에서 날카로운 비판적 관점보다 날씨나 동물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 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MBC의 수뇌부가 의 민감한 주제를 다룬 특집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임을, 또 역시 고깝게 보았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이른바 ‘MBC 녹취록’을 둘러싼 사태에 다시 한번 놀라는 것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고전적 수사의 또 다른 반복이다. MBC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은 그들의 말로 ‘손바닥만 한’ 극우 인터넷신문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본심을 털어놓았다.

어떤 ‘증거’도 없이 노조에 관계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조합원 신분인 두 사람을 해고했고, MBC 라디오는 “다 빨갛다”고 말할 정도로 편향돼 문제이며, 이나 같은 예능 프로그램들 역시 국민의 정치의식에 좌편향적 악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손을 못 대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다.

MBC의 어떤 특이한 사람이 돌발 발언을 한 것일까? 이 녹취록이 공개된 날 MBC는 녹취록을 언론에 제공한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의원의 선거법 위반 혐의 내사 사실을 보도했다.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경찰이 내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의 ‘묵은 뉴스’를 26초간 전했다. 최민희 의원이 청탁의 대가를 받았다거나 금품을 살포했다는 내용도 아니다. 단지 공무원들에게 명함을 주며 인사했다고 한다. 그러니 ‘보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모범적인 공영방송이라면 당연히 녹취록을 통해 드러난 문제가 사실인지 진상을 조사하고 관련자를 징계하고 재발 방지를 시청자에게 약속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한다. 그러나 MBC가 집단적 태도로서 선택한 것은 ‘우릴 건드렸다 이거지? 가만있을쏘냐’는 식의 정면 대결이다. 녹취록 사건을 결코 돌발적인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결국 우리가 ‘혹시나’ 하면서도 진실로 믿어왔던, 말하자면 ‘외설적 진실’이 ‘역시나’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이제 우리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지만 TV를 보면서 의심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찾게 됐다.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서 고위 임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연출한 장면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됐고, 뉴스를 보면서도 혹시 화면에 등장한 저 사람이 방송사 수뇌부에 큰 해를 끼쳤던 게 아닐까 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 우리는 뉴스 가치가 없는 문제라고 여겨졌던 문제가 TV 화면에 나오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따져봐야만 하고, 어떤 문제가 TV 화면에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의심해야만 한다.

음모론의 창궐은 어떤 의미에서 언론이 상대해야 할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해 모든 진실을 밝혀내고 의문을 일소한다면 음모론은 자기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음모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음모론의 가장 큰 자양분은 어떤 사실의 너머에 어떤 진정한 진실이 있다고 믿는 형태의 냉소다.

MBC 녹취록 사태는 영화로나 표현될 만한 ‘진정한 진실’의 모습을 현실로서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왜 음모론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는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바로 이게 MBC라는 공영방송이 지금 우리 사회에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이다. 이제 누가 MBC라는 언론의 ‘순기능’을 신뢰하겠는가?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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