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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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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도 쇳물에서 피어난 1.5mm 꽃

⑨ 주물공의 래들(쇳물 양동이): 자동차 핵심 부품 1.5mm 피스톤링 만드는 대한이연 이영원씨
등록 2015-12-17 15:30 수정 2020-05-03 07:17

‘윙~’ 굉음을 울리며 시뻘건 쇳물을 토해낸다. 무쇠(선철, 탄소 함유량이 1.7% 이상인 철)와 무른쇠(연철, 탄소 함유량이 0.2% 이하인 철)를 품은 2.5t 전기로가 출렁인다. 이영원(38) 계장이 ‘반재’라고 부르는 가시 모양의 쇳덩어리를 던져넣는다. 화염에 휩싸인 전기로가 부글거린다. 영원씨가 침전식 온도계를 전기로에 넣는다. 조금 더 끓어야 한다. 불순물 제거제를 뿌리고 쇠막대기로 휘젓는다. 쇳물과 불꽃이 튀어오른다. 쇠막대기가 뭉쳐진 쇳물 찌꺼기를 건져올린다. 합금철을 넣고 쇳물의 성분을 검사한다. 목표 성분치에 도달했다. 온도계를 다시 넣는다. 1539도, 적당하다.

가장 얇지만 가장 강한 부품

전기로 뚜껑이 열린다. 전기로가 비스듬히 기울어 ‘래들’이라고 불리는 쇳물 양동이에 쇳물을 쏟아낸다. 끓는 쇳물을 담은 래들 손잡이를 천장 크레인에 연결한다. 하늘에 매달린 래들이 줄 맞춰 쌓여 있는 거푸집으로 향한다. 자동차 엔진의 핵심 부품 피스톤링을 만드는 조형틀이 하나씩 반듯하게 올려져 20단을 이루었다. 조형틀 위에 주입컵이 올려져 있다. 허리를 살짝 숙여 래들의 핸들을 천천히 돌린다. 붕어빵 반죽을 붓는 주전자처럼 래들을 살며시 기울여 쇳물을 주입컵에 붓는다. 붉은 쇳물이 거푸집 위에서 출렁거리며 하얀 연기를 피운다. 다음 조형틀로 래들을 옮긴다.

짝을 이룬 동료 작업자가 래들 안에 쇳물의 냉각을 지연시키는 분말실리콘을 넣는다. 열 세트의 거푸집이 돌고 식은 쇳물을 빈 항아리에 버린다. 영원씨가 거푸집에서 피스톤링 하나를 꺼내온다. 링을 깨 절단면을 찬찬히 뜯어본다. 조직이 균일한지 살핀다. 래들을 끌어와 전기로 앞에 내려놓는다. 보안경을 벗어 땀을 닦아낸다.

피스톤 왕복운동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피스톤링은 피스톤과 실린더 사이의 기밀을 유지하고 열을 전달하며 접촉운동을 원활하게 하는 부품이다. 압축링 두 개와 오일링 한 개로 구성된 피스톤링이 마모되면 실린더 벽의 오일을 긁어내지 못해 엔진오일이 타들어간다. 수천억 번의 피스톤 왕복운동에도 닳지 않고, 폐차할 때까지 버티는 피스톤링의 두께는 1.5mm. 2만 개의 자동차 부품 가운데 가장 얇지만 가장 강하다.

국내에서 피스톤링을 생산하는 업체는 영원씨가 일하는 대한이연과 유성기업뿐이다. “모래를 배합해 조형틀을 만들고 쇳물을 끓여 붓고 피스톤링의 표면을 가공하는 고난도의 모든 작업이 일일이 손으로 이루어집니다. 안전과 직결된 제품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영원씨의 손을 거친 1500도 쇳물이 10원짜리 동전보다 얇은 링으로 탄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20일이다.

1500도 쇳물을 견뎌내는 신비한 래들의 비결은 흙이다. 쇠로 만든 양동이 표면에 물과 흑연, 벤토나이트라는 찰흙을 섞어 여러 겹으로 정성껏 발라준다. 벤토나이트는 도자기를 만드는 재료다. 대형 토치로 래들 안팎을 오랫동안 말린다. 쇳물이 래들 벽에 달라붙지 않고, 불순물이 잘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래들 3개를 준비하는 데 2시간이 걸렸다. “건조가 안 된 상태에서 쇳물을 부으면 폭발할 수도 있어요. 래들을 수리하는 데 온 정성을 다하는 이유입니다.” 한 양동이 붉은 쇳물이 200개의 피스톤링 꽃으로 태어났다. 금형과 주조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피스톤링은 가공 공정에서 황삭(거친 연마)과 사상(고운 연마)을 거쳐 완성된다. 자동차, 이륜차, 굴삭기의 엔진에 탑재돼 거리를 달린다.

뿌리산업에 바친 영원씨의 20년

영원씨는 20년 전인 1995년 대한이연에 입사했다. 실린더라이너, 큐폴라(바람을 일으켜 쇳물을 녹이는 공정), 전기로 조형 공정을 거치며 일을 배웠다. 새로운 일을 배우기 좋아하는 영원씨는 한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공정이 바뀔 때마다 외우고 익혀야 할 일이 많았지만, 그만큼 보람 있었다. 20년의 시간, 영원씨는 쇳물에 들어가는 수십 가지의 합금철과 수많은 재료, 성분들을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아이들을 회사에 여러 번 데려왔어요. 모래도 만져보고 피스톤링도 보여줬죠. 아이들이 아빠가 위험한 일 한다고 걱정하더라고요. 아빠가 하는 일이 우리가 타는 자동차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부품을 만든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죠.”

일은 고되고 힘들다. 분진이 날리고, 전기로 열이 강해 눈이 따갑고 아프다. 삼겹살 익듯 얼굴이 달아오른다. 보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두 겹으로 착용해 얼굴을 보호한다. 쇳물에 데는 일은 흔하다. 작업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장갑도 두 켤레를 낀다. 폭발사고의 위험과 동거하는 일은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다. 세금을 공제하기 전 그의 연봉은 6천만원이 넘는다. 유해수당이 많고 매일 3시간 이상 잔업을 한 결과다. 무엇보다 든든한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이다.

영원씨가 2007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실린더라이너 물량이 줄어들고, 적자가 계속되고 있다며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했다. 희망퇴직부터 받겠다고 했다. 영원씨와 동료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2공장 조합원들이 일을 안 해서 회사가 어려워졌다며 직원들을 분열시켰다. 회사는 라이너 공정을 폐쇄하고 일부 공장을 외주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평생을 쇳물과 살아온 주물공들이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희망퇴직금이라도 받고 나가야 남아 있는 사람들도 사는 거 아니냐”며 깊은 시름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때 한 조합원이 손으로 쓴 대자보가 공장에 내걸렸다. 동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육과 토론이 계속됐다. 노조는 ‘인원 축소를 전제로 한 인위적 구조조정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요구를 내걸었다. 파업 찬반 투표 결과 80% 찬성.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았다. 전기로에 불이 꺼지고, 피스톤링 생산이 멈췄다. 결국 회사는 “지회에서 제시한 인위적 구조조정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임금을 동결했지만, 단 한 명의 동료도 내보내지 않았다.

영원씨는 다음해 직장 동료였던 아내와 결혼했다. “만약 2007년도에 회사가 제시한 구조조정을 받아들였다면 여기가 비정규직 공장이 됐겠죠.” 금속노조 대한이연 엄연섭 지회장이 전기로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는다.

대한이연은 ‘비정규직 없는 공장’이다. 경비 아저씨도, 식당 아주머니도 모두 정규직이다. 2006년 노조가 회사에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청소노동자는 정년이 지나 정규직을 원하지 않아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 임금이 오른 만큼 월급이 인상된다.

영원씨와 동료들은 뿌리산업에서 일한다. 제조업 경쟁력의 근간이 된다는 의미의 뿌리산업은 주조·금형·용접·표면처리·소성가공·열처리 등 부품이나 완제품을 생산하는 기초산업을 말한다.

지난 12월7일 정부와 새누리당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삼신화학공업을 방문했다. 새누리당 김정훈 정책위의장은 “뿌리산업의 경우 주조·금형·용접 등 우리나라 핵심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청년층의 취업 기피와 이직률 증가로 인해 인력난이 심각하다”며 뿌리산업에 파견을 전면 허용하는 법안을 올해 안에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 등 6대 뿌리산업 관계자들이 새누리당을 찾아 파견법 통과를 요청했다.

비정규직 없는 공장

같은 날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개혁 5대 입법, 연내 반드시 완료되어야 합니다’라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55살 이상, 전문직, 뿌리산업에 파견을 전면 허용하는 법안이 “중·장년층에게 새로운, 그리고 더 나은 일자리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기간제법을 비정규직근로자 고용안정법, 파견법을 중장년일자리법이라고 이름 붙인 고용노동부 공식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이 압권이다.

“정말 멋진 법이에요. 그럴싸하게 적어둬서 끝까지 읽게 되었네요. ㅋㅋㅋㅋㅋㅋ 숙련이 필요한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있는 관행 자체가 문제인 겁니다. 내 참 뭘 어디까지 잘못돼 있는 건지. ㅋㅋㅋ 이 법안이 통과되면 국민 대다수는 이제 노동자가 아닌 노예로 살게 되겠네요. 파견근로의 확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말을 안 하겠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파견근로가 청소경비보다는 나으니 이거라도 해라인가요?”

“이거 하면 고용 안정되냐?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국가가 생각하는 국민은 재벌 일가뿐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네요~.”

“헉 비정규직 2년 대신 4년이라. ㅋㅋ 한 30년은 바꿔주지 저것도 바뀐 거라고.”

조선시대에도 대장장이들은 기술자로 대접해줬다. 박근혜 정권은 오랜 숙련과 기술을 요하는 뿌리산업을 날품팔이 파견노동으로 대접하겠단다. 뿌리산업만이 아니다. 한국표준직업분류표에 따르면 전문직 업무는 4천 개가 넘는다. 유치원 교사, 기자, 보험 및 금융관리자, 기술영업원도 포함돼 있다. 기간제 사용 기한이 4년으로 늘어나는 것처럼 파견도 사용 기한이 4년으로 연장된다. 사장님들은 인력회사에서 노동자를 파견받아 4년 동안 쓰다가 해고하거나, 계약직으로 고용하면 된다. 숙련된 비정규직을 8년까지 부려먹을 수 있는 법안, 정규직을 채용할 이유가 사라지는 ‘박근혜 노동법’이 국회에 대기하고 있다.

숙련된 비정규직을 8년까지 쓰기

“1996년 이 공장에 처음 와서 동기들 셋과 같이 일을 시작했어요. 먼지가 뿌옇게 쌓여 앞도 잘 안 보였죠. 오전 일 끝나고 점심 먹을 때 보니까 3명이 모두 가버리고, 저 혼자 남았더라고요.”

엄연섭 지회장이 옛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도망가고 싶은 회사를 일하고 싶은 일터로 만든 건 노동조합이었다. 올해만 신입사원을 8명 뽑았는데 경쟁률이 10 대 1을 넘었다. 매출액도 2007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해고 걱정 없는 안정된 일터에서 질 좋은 자동차 부품이 만들어진다.

산업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대기업 협력업체의 경영 성과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 영업이익률은 2008년 5.7%에서 2013년 13.8%로 높아졌다. 반면 삼성전자 협력업체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에 4.6%에서 4.2%로 줄었다. 현대자동차도 2008년 5.8%에서 2013년 8.9%로, 현대차 계열 부품사의 영업이익률은 8.2%에서 9.3%로 증가했다. 그런데 계열사가 아닌 부품사의 영업이익률은 3.6%에서 3.3%로 도리어 줄어들었다. 현대차에 똑같이 부품을 납품해도 계열사에 비해 3분의 1밖에 돈을 못 번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5월 300개 회사를 상대로 실시한 ‘중소제조업 납품단가 반영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2년 동안 중소 제조업체가 체감하는 제조원가는 6.2%포인트 상승한 반면, 납품단가는 1.4%포인트 하락했다. 48.7%가 납품단가 인상을 요청한 경험이 없었다. 거래 단절 우려(26.0%)나 인상 요청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24.7%)하기 때문이었다. 엄 지회장은 “뿌리산업에 필요한 것 파견이 아니라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막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기술과 사양이 좋아지면서 피스톤링의 두께도 1.2mm, 1mm로 점점 얇아진다. 얇고 가볍고 내구성 강한 저장력 피스톤링으로 기술 개발이 계속된다. 영원씨는 새로운 기술을 익혀 더 질 좋은 피스톤링을 만드는 일이 행복하다. 오래도록 좋은 부품을 만들다 선배들처럼 이 회사에서 명예롭게 정년을 맞았으면 좋겠다.

뿌리산업 인력난의 원인은 재벌 갑질

영원씨는 오늘도 밤 9시 퇴근이다. 초등학교 4학년과 7살 두 딸은 주말이 아니면 아빠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 노조는 철야 노동을 없애고 주간 2교대 근무를 요구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이 기다려진다. 퇴근한 영원씨가 잠든 두 딸아이를 바라본다. 정직한 땀과 노동이 인정받고 오랜 숙련과 재주가 대접받는 사회에서 이 아이들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영원씨는 오늘도 쇳물을 녹인다. 절망과 한숨 가득한 세상을 녹인다.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 @ccomark, ccamcy@gmail.com

사진 노순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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