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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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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의 싱크홀

등록 2015-03-06 14:59 수정 2020-05-03 04:27

명절마다 친척들을 만나는 일에는 고된 감정노동이 뒤따른다. 누구는 차를 뭐로 바꿨다더라. 누구네 아들은 어디 취직했다더라. 누구넨 몇십 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더라. 누구네 애는 전교에서 몇 등 한다더라. 누구네 딸내미는 어떤 집으로 시집을 갔다더라. 온갖 비교와 경쟁이 판치는 대화들 속에서 무엇 하나 부모님의 자랑거리를 내어드릴 수 없었던 나는 오랫동안 화제의 중심에서 비켜나고자 눈치 백단의 명절을 보내야 했다. ‘쟤가 나중에 정치하려고 저리 고생한다’는 어이없는 예측을 일삼던 친척들은 마흔이 넘어서까지 작은 단체에서 가난한 활동가로 살아가는 나를 해석할 언어가 없었는지 언제부턴가 잠잠해졌다. 그 침묵이 나는 반가웠다. 공식 통계로는 잡히지 않아 그 수를 헤아릴 길 없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나와 비슷한 명절의 역사를 지나왔을 테고, 지난 설도 그리 보냈을 것 같다.

우리 애 ‘좋은 일 한다’는 부모님

세월이 흐른 덕분이기도 하지만 친척들을 대하는 마음이 제법 홀가분해진 건 그이들이 들이대는 잣대로부터 나 자신이 차차 벗어났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극빈층으로 분류될 만한 삶의 고단함과 불안, 이른바 정상적 삶을 기대하는 주변의 압박을 버텨낼 근력은 당연히도 한순간에 생겨난 게 아니다. 주류의 기준으로는 결코 셈할 수 없는 어떤 충만함이 활동을 통해 내 삶에 깃들고 켜켜이 쌓인 덕분이었다. 부모님의 이해도 한몫했다. 나는 사람의 존엄이 지켜지는 세상을 미래의 언젠가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궈가는 운동이 좋았다. 부모님은 우리 애가 ‘좋은 일 한다’고 번역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내게는 단체를 키우기보다 운동을 넓혀야 한다는 원칙을 동료들과 일궈왔다는 자부심이 컸다. 부모님은 이름도 없는 단체에서 고생한다고 해석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가 아닌,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하는 역동적인 삶을 ‘선택’했다. 부모님은 벤처사업(?) 같은 걸 한답시고 많은 걸 ‘포기’했다고 이해했다. 나는 고용구조와 능력체계를 벗어난 조직을 둥지로 갖게 된 것에 감사했다. 부모님은 사장이나 대표가 없는, 나이도 경력도 다른 이들이 똑같은 활동비를 받는 우리 단체를 외계 생명체처럼 신기해했다. 이런 차이에도 부모님이 내 삶을 인정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있다. 내가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해한다는 것, 그리고 해고당할 리 없는 일터와 꽤 괜찮은 동료들을 갖고 있다는 것. 내가 속한 단체의 서사는 주류의 기준을 여전히 포기 못한 부모님에게도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 같다.

나는 사회운동이 서사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세계라고 믿는다. 시민들이 어려운 살림에도 기꺼이 단체 후원에 지갑을 열고 활동에 동참하는 까닭도 운동이 내건 기치뿐 아니라 그 운동을 엮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끌리기’ 때문이다. 조직의 외양이 무엇이든, 어떤 간판을 내걸었든, 핵심 의제가 무엇이든, 조직의 구성원과 시민들이 그 운동을 긍정할 만한 서사를 구성할 수 없다면, 그 운동은 좌초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공익을 내세운 조직들이 자신의 기치를 배반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사진의 평화롭지 못한 운영으로 활동가들의 집단 사퇴를 낳은 평화박물관, 함께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내쫓은 함께일하는재단, 해고노동자들의 심리 치유를 돕던 활동가들을 대거 해고한 마인드프리즘 사태는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전체 사회운동은 물론, 어려운 조건에서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은 심각한 내상을 입곤 한다.

도처에 싱크홀, 파헤치고 바로잡아야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낡은 의제를 부여잡고 있어서만 사회운동이 망하는 게 아니다. 사회운동이 기업의 갑질은 비판하면서도 활동가들에게 갑질을 해댈 때, 그리하여 변화시키겠다던 사회구조를 스스로 재생산하는 단위가 될 때, 운동이 딛고 선 토대가 무너진다. 싱크홀은 사회운동 도처에 널려 있다. 부끄러워도 파헤치고 바로잡아야 한다.

*‘배경내의 노 땡큐!’는 이번으로 마칩니다. ‘노 땡큐!’는 다음주부터 새로운 필자들이 차례로 인사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분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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