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해’처럼 웃으세요

대종경 목판화 옮기는 바쁜 작업 중 스티커 제작…
“정말 친절하길 바란다면 비정규직으로 간접고용 하면 안 되지 않나”
등록 2014-10-08 15:28 수정 2020-05-03 04:27
판화가 이철수씨가 30일 오후 충북 제천 백운면 평도리 작업실에서 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제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판화가 이철수씨가 30일 오후 충북 제천 백운면 평도리 작업실에서 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제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케이블 설치기사들과 판화가 이철수씨가 30일 오후 충북 제천 백운면 평동리 이철수 판화가의 집에서 ‘진짜 해피콜‘ 로고가 새겨진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제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케이블 설치기사들과 판화가 이철수씨가 30일 오후 충북 제천 백운면 평동리 이철수 판화가의 집에서 ‘진짜 해피콜‘ 로고가 새겨진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제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비정규직 설치·수리 기사를 응원하는 캠페인 ‘진짜 해피콜’이 재능 이어달리기 방식으로 이어진다. 판화가 이철수 선생이 첫 타자로 ‘진짜 해피콜’ 스티커를 만들어줬다. 붉은 ‘해’처럼 노동자들이 웃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작품이다. 은 삼성전자서비스,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의 설치·수리 기사들과 함께 지난 9월30일 충북 제천에 가서 이철수 선생을 만나고 왔다. 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laborhappy)과 지면을 통해 마음 이어달리기를 중계한다. _편집자


광고

이철수는 ‘판화로 시를 쓴다’. 그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때론 1980년대를 뜨겁게 울렸던 격정이 꿈틀대기도 하고, 때론 단순하면서도 질박한 세상살이가 담겨 있기도 하다. 요즘 이철수는 원불교의 대종경을 목판화로 옮기는 작업에 한창이다. 내년 봄까지 150개 작품을 완성해내야 한다. 작업과 농사일, 정원 가꾸기 말고는 외출도, 사람 만나기도 삼가고 있다. 독자 8만 명에게 매일 온라인 엽서로 보내고 있는 ‘나뭇잎편지’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한다. 그런 그가 설치·수리 기사들을 위한 스티커를 만들겠노라고 흔쾌히 약속하고, 집에 와서 막걸리 한잔 마시고 가라고 선뜻 청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한 서비스

-바쁜데도 설치·수리 기사를 위한 재능기부에 흔쾌히 응해줬는데.

=우리 집에 제일 많이 드나드는 분이 우편배달부다. 폭우에도, 혹한에도 오토바이 타고 오는 걸 보면 걱정이 많이 된다. 얼마 전 우편배달부들이 모두 비정규직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나마 임금도 빤해질 텐데 답답하고 안타깝더라. 방문서비스 하는 설치·수리 기사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이니 고용유연성이니 하면서 점점 더 가혹해지니까. 처음 스티커 부탁 전화를 받고 한참을 생각했다. 설치·수리 기사들이 타고 달리는 저 자동차 안에 가족이 다 실려 있겠구나. 그렇게 가혹해지면 아이들은, 가정은 어떻게 되나.

-평소 설치·수리 기사들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나.

광고

=짜증스러운 표정이나 말투로 이야기하는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작업할 때 “마음 편히 하라”고 말을 걸면, 대답을 진지하게 하느라고 일손을 놓더라. 시간 뺏는다는 생각에 옆에서 말 거는 것도 부담스럽더라. 기사가 가고 나서 해피콜로 “서비스 잘 받았느냐”는 전화를 받으면 “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한 서비스를 받았다”고 대답한다. 이 업무가 감정노동에 속하지 않나. 작업을 마치고 나면 청소까지 싹 마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많은 걸 보고 놀랐다.

(옆에 앉아 있던 씨앤앰 비정규직지부의 한 노동자가 “원청업체가 서비스를 평가해서 벌점을 받는 만큼 협력업체에 수수료를 적게 준다”고 설명해줬다. 위영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장은 “청소도 매뉴얼에 정해져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 전체가 모든 서비스를 사람이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엔 설치·수리 기사가 오면 ‘기술’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존중이 있었는데, 이제는 ‘기능’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를 불편하지 않게 해주는 ‘기능’이 다녀가면 좋은 거다. 사생활을 엿보는 느낌이 싫은 사람은 차라리 로봇이 와서 해주는 걸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우리 사회가 다 돈 중심이 됐다. 정말 친절한 기사들이 회사 마크 달고 다니길 바라면, 대기업들이 이런 식으로 기사들을 비정규직으로 간접고용 하면 안 되지 않나? 자존감도 있고 보람도 있어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서비스가 가능한 건데, 서비스를 쥐어짠다.

-‘나뭇잎편지’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나 세월호 등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광고

=나는 저항적인 미술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사람이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 사람들이 예술에 기대하는 바도 변했다. 현실에 비판적인 목소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 있다. 그래서 온라인 엽서로 세상에 이야기를 건네길 꿈꿨다. 바쁜 호흡으로 이야기하기보다, 조금 천천히 이야기하는 자리로 ‘나뭇잎편지’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조금 흥분하거나 분개하는 때가 있고, 그런 때는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나는 이게 삶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왜 정치적인 이야기를 계속 하느냐’는 반응도 있다. 삶의 피로도가 높아서, 부담스런 현실은 피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다만 나는 이게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만은 해주고 싶다.

인간성의 마모에 맞서는 싸움

-여기 직접 온 설치·수리 기사들한테 응원의 한마디 해달라.

=여러분의 막막함을 잘 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겠거니 하며 그린다. 그 목소리에 메아리가 없으면 얼마나 힘이 들겠나. 그런 마음을 담아 늘 엽서를 쓴다. 오늘 여러분과의 이야기도 엽서에 쓸 거다. 이건 여러분을 응원하는 것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인간성의 마모에 맞서는 싸움의 일환이기도 하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닳아 문드러진 기계 톱니바퀴처럼 모든 사람이 병들어갈지 모른다. 지치지 마시라.

오후 2시 무렵 따듯한 차를 나눠 마시며 시작된 이야기는 4시간을 훌쩍 넘어 도란도란 이어졌다. 집 뒷마당에 심어놓은 대나무 잎이 바람에 사각대는 소리를 배경 삼아, 제주 강정마을에서 선물로 올라온 고기가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었다. 이철수 선생 부부가 텃밭에서 직접 기른 배추, 고추, 마늘, 밑반찬 등으로 저녁상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위영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장은 “오랜만에 입이 호강한다”고, 박석훈 케이블방송 씨앤앰 비정규직지부 부지부장은 “하룻밤 자고 가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축 늘어졌던 비정규직 설치·수리 기사들의 어깨가 오랜만에 으쓱해졌다. 이철수 선생은 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줄 두 번째 타자로 연극인 유순웅씨를 추천했다. 유씨는 2004년부터 연극 의 주인공으로 열연해왔고, 최근 영화 에 거북선을 제작한 노인으로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제천=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