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뙤약볕에서 시작된 싸움이, 어느덧 초가을에 접어들었다. LG유플러스 인터넷 설치기사 김태경(35)씨가 일터에서 쫓겨난 지도 9월25일로 두 달째, 서울 여의도 LG 쌍둥이빌딩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도 일주일째다. “농성하다가 어제 잠깐 집에 들렀어요. 네 살짜리 아들이 ‘진짜 갖고싶다’고 말하는 게 마음 아파서 큰맘 먹고 5만원짜리 ‘카봇’ 장난감을 사줬죠. 그런데 밤에 아내가 스킨로션이 떨어진 지 오래라며 샘플로션을 바르고 있더라고요. 아무 말도 못한 채 나와서 담배만 피웠습니다.” 그의 얼굴 위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둑한 한강변에선 서늘바람이 불어왔다.
7월 중순 노조원들 코드 아예 삭제김씨가 일했던 회사는 경기도 광주·하남 LGU유플러스 고객서비스센터를 위탁운영했던 (주)스피드파워다. 회사는 인터넷·집전화를 개통해주거나 애프터서비스(AS) 업무를 담당하는 기사들과 근로계약을 맺거나 도급계약을 맺었다. 지난 2년 동안 센터 운영을 맡았던 위탁업체는 4곳에 이른다. 센터장이 바뀌어도 ‘LGU+’ 로고가 선명히 박힌 작업복을 입은 기사들 대부분은 변함없이 일했다. 그런데 지난 3월30일 LG유플러스에 노동조합인 비정규직지부가 처음 결성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김지수 비정규직지부 광주·하남지회장은 “센터장이 그동안 따로 맡던 개통과 AS 업무를 ‘멀티’로(한꺼번에) 하라고 지난 5월 통보했다. 전환을 거부했더니 7월 말 회사를 폐업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LG와 새롭게 업무 위탁 계약을 맺은 협력업체가 들어왔는데, 월 130만원 저임금을 받아들이라며 고용 승계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기사 9명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노동조합이 생긴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고석훈 용인 부지회장이 일했던 경기도 용인센터에서는 30여 명이 동시에 일감을 잃었다. “기사들에겐 업무를 할 수 있는 코드가 주어지는데 7월 중순부터 노조원들의 코드를 아예 삭제해버렸다. 노조원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는 대신 회사는 2~3개월짜리 단기 알바를 고용해 대체인력으로 투입하고 있다.” 노조 설립 당시 전국 63개였던 고객서비스센터는 최근 센터 내부에 소사장을 두거나, 관할구역을 잘게 나누는 방식으로 작은 센터들로 분할되고 있다. 일부러 새로운 법인(센터)을 만들어 노조와의 교섭권을 쓸모없게 해버리는 것 아니냐고 노조는 의심한다.
이에 경기도 광주·하남지회와 용인지회를 중심으로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는 지난 9월19일부터 서울 여의도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왜 여의도 LG 쌍둥이빌딩 앞일까? 이들은 센터장이라고 불리는 위탁업체(협력업체)의 사장은 ‘가짜 사장’일 뿐이고, ‘진짜 사장’은 LG유플러스라고 주장한다. LG유플러스가 개통·AS 기사들을 교육하고 우수 기사 표창을 주는 등 인력 관리를 책임져왔기 때문에, 자신들은 불법파견된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 그렇게 중요 업무라면?…‘LG유플러스→센터→소사장→기사’로 이어지는 이중 삼중의 사슬망에 포획돼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하다. 각 단계마다 10~40%씩 수수료를 떼가다보니, 기사들의 실급여는 월 200만원 안팎이다. 야간·휴일 근무를 아무리 해도 각종 수당을 챙긴 적이 없다. 게다가 밥값·기름값은 물론 자재값까지 모두 자비 부담이다. 개통 기사들의 경우엔 센터와 도급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 즉 특수고용직이라는 이유에서다. 일하다가 산업재해를 당해도 회사는 나 몰라라 한다. 7년 넘게 LG유플러스에서 일한 최영열 비정규직지부 부지부장은 농성에 들어가기 전날인 9월18일, 인터넷 개통 작업 중 고객 집 방문에 찧어 왼쪽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 깁스까지 했지만 회사는 치료비 한 푼 대주지 않았다.
이런 노동조건이나 근무형태 등은 경쟁 기업인 SK브로드밴드도 비슷하다. 대기업들은 놀랄 만큼 ‘쌍둥이’처럼 닮았다. 노조 결성 이후에 원청이 “개통·AS 기사들은 협력업체 소속일 뿐”이라며 뒷짐지거나, 협력업체(센터)들이 교섭권을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위임한 것 또한 앞서 삼성전자서비스 등이 보여준 모습 그대로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우린 센터가 기사들이랑 어떤 계약을 맺는지 전혀 관여하지 않고 서비스 기사의 친절도 교육 등에만 관여한다. 기사들은 우리가 아니라 센터장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 노조는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벌이는 등 ‘첫 파업’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의외의 걸림돌이 등장했다. 경총이 두 회사의 서비스센터를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해달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전기·가스·철도 같은 필수공익사업장에선 국민의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파업 참가 대상 업무와 인원 등이 제한된다. 두 노조가 속한 민주노총 서울본부 희망연대노동조합의 이종탁 공동위원장은 “그렇게 중요한 업무라면 지금껏 왜 하청을 줘왔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직접 고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비슷한 업무를 하는 씨앤앰·티브로드 등의 협력업체는 공익사업장으로만 분류돼 있다.
노조원 수천 명이 모이자 미세하지만 변화의 조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종탁 위원장은 “엘지유플러스 협력업체 쪽이 ‘개인사업자로 등재돼 있는 개통기사들을 AS기사와 마찬가지로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로 인정해주도록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논의해보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최근 간접고용 노동자를 원청 소속 정규직으로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라 나오는 것도 힘을 북돋는다. 대법원은 대우일렉트로닉스와 서비스대행계약을 맺은 센터에서 가전제품을 설치·수리했던 기사들을 원청 노동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지난 9월2일 확정했다.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모두 1심에서 불법파견 사실을 인정받았다.
특별근로감독 결과 조만간 발표 예정고용노동부도 조만간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 사업장에 대해 지난 5월 벌인 특별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박광일 고용노동부 근로개선정책과장은 “각 지청이 보고서를 작성 중이고, 여러 가지 복잡한 쟁점에 대해 법률 검토를 마쳤다. 조만간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개통·수리 기사들이 노동자가 맞는지, 그동안 각종 수당 등을 미지급한 게 근로기준법 위반인지가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9월25일 저녁, 서울 여의도 농성장에 응원 대오가 400명 넘게 모였다. 이 자리에서 지역케이블방송 설치기사인 씨앤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봉투’를 전달했다. 두 달째 급여가 끊긴 LG유플러스 노동자들을 걱정하는 동병상련이다. 박석훈 씨앤앰 비정규직지부 부지부장은 “우린 노숙 78일째다. 제발 노숙하면서 아프지 마라. 아프면 지는 거다. 우리도 월급을 못 받는 처지라 큰돈은 아니지만 노조 간부 10명이 마음을 모았다”고 말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농성장이 순간 따스해졌다. 다른 한편에선 아빠를 응원하러 나온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웃는 모습이 어두운 농성장을 별처럼 밝혔다.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가 공동으로 벌이는 간접고용 설치·수리 기사 응원 캠페인 ‘진짜 해피콜’에 마음을 보태고 싶은 분들은 후원 계좌(우리은행 1002-780-812640 황철우: 진짜 해피콜)로 직접 돈을 보내거나, 자동이체 신청(문의전화 010-5696-2550)을 하면 된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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