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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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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꼬지 마!

등록 2014-01-30 07:23 수정 2020-05-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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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사 인권연수를 진행하면서 의자를 활용해 교장실 공간을 재현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교장 자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 대열로 두 개씩 의자가 놓인 공간이 만들어졌다. 교장의 권위가 공간을 짜는 중심축이 된 셈이다. 한 분에게 교장 역할을 부탁드린 다음, 학교의 일방적 연구학교 지정 신청에 반대하는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교사들이 교장실을 항의 방문하는 상황을 설정했다. 항의방문단 역할로 초대받은 이들은 다섯, 그런데 남겨진 자리는 넷이다. 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이 많은 남교사가 교장과 악수를 청하며 자연스레 맨 앞자리에 앉았다. 여교사들은 다소곳이 나이순에 따라 교장과 가깝고 먼 자리를 결정했다. 제일 어린 여교사는 뒤에 서 있겠다며 알아서 양보했다. 미리 발언 순서를 정하지 않았는데도 교장과 가장 가까이 앉은 남교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상황극을 멈추고 뒤에 서 있던 여교사에게 자기의 발언 순서는 몇 번째로 예상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않고 서 있기만 하다가 나갈 것 같은데요?” 사람들은 사회가 허락한 자리를 자연스레 찾아가 앉았고, 그 자리가 허락한 지위에 맞게끔 태도를 결정했다.

몸이 기억하는 내게 걸맞은 자리

‘몸이 가난을 기억해요.’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우리 몸은 ‘사회가 할당해준 자리’를 기억한다. 그래서 할당된 자리를 벗어나거나 또 그 자리에 기대되는 역할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눈총을 받거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곤 한다. 사회단체 기자회견에서도 부러 자리를 지정해놓지 않아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자리 배치 방식이 존재한다. 그 의제와 관련해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온 사람이라도 단체 규모가 작거나 젊다면, 명망 있는(?) 단체와 원로에게 할당된 가운데 자리에 떡하니 앉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1월10일 서울학생인권조례 개정안 공청회 자리에서 일어난 일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대개 관에서 여는 행사에서 학생 발언은 교사·학부모·‘전문가’ 뒤에 배치되기 마련인데, 학생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교육청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던지 학생에게 가장 먼저 순서가 주어졌다. 개정안 마련 과정에서 학생이 철저하게 배제됐고 그 내용도 문제가 많다는 발언을 마친 학생이 항의의 뜻으로 단상에서 내려가겠다고 선언했다. 일종의 부분적 보이콧이었다. 그러자 조례 개정 또는 폐기를 주장하는 보수단체 회원들의 조롱과 욕설이 쏟아졌다. “그래 그래~ 학교 가서 공부나 해라.” “입 닥쳐, 찢어버린다.” “×년.” 애초 학생이 낄 자리가 아닌데도 토론자로 초대받았으면 감지덕지해야지, 맘에 안 드는 주장을 펴는 것도 모자라 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아마도 조롱과 욕설의 이면에는 이런 판단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져 내 토론 순서가 돌아왔을 무렵에는 ‘저분들과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간 테러를 당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공포심마저 일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인권조례의 존재 의미와 개정이 부당한 이유를 댈 때마다 욕설과 호통이 돌아왔다. 긴장감을 감추고 싶었던지 나도 모르게 다리를 꼬았나보다. “다리 꼬지 마!” 위압적인 고성으로 한 나이 든 남자가 소리쳤고 뒤이어 여러 청중이 같은 악다구니를 반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도 아니고 왜 하필 ‘다리 꼬지 마!’였을까. 이른바 ‘전문가’ 몫으로 배정된 토론자로 초대받은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나이가 좀더 지긋했다면, 활동가가 아니라 교수 정도의 직함을 가졌다면, 과연 다리를 꼰 게 문제가 되었을까. 나이 지긋한 남자 교수의 다리 꼬기는 오히려 여유로움과 전문성의 증표는 아니었을까.

나이 지긋한 남자 교수여도 그랬을까

중심에서 주변까지 빼곡히 차별적으로 할당된 자리에 우리 몸이 놓여 있다. 다리를 꼴지 말지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강퍅한 시달림의 자리에 누군가의 몸이 놓여 있다. 몸이 허락된 자리의 위계와 통념을 교란시키는 실험이 빚어낼 즐거운 소란이 더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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