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명진
우리 사회엔 최소한의 일관성이 있을까, 라는 의문을 종종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각 분야를 조율하고 중심을 잡아줘야 할 정치의 문제이기는 하나, 꼭 정치에만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어찌 보면 게임이 대표적인 분야인데요. 게임산업은 지난해 3조원 가까운 수출을 달성한 ‘수출역군’입니다. 케이팝(K-POP)보다 13배나 많지요. 정작 경제적 효과는 극찬하면서도, 유력 정치인 중 한 사람은 게임을 ‘4대 악’ 중 하나라고 규탄합니다.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죠. 자녀들이 정보기술(IT)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게임에 빠질까 걱정으로 맘을 졸입니다.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 문제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정돈된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IT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가 한 사람을 적극 추천해주더군요. 한국의 게임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았다는 게임 를 만든 사람,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입니다.
일상다반사! 근래에 계속 있던 일이라 별 느낌이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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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직접 코딩을 할 수 있으면 좋은 거죠.
반대하지는 않아요. 인류 궁극의 직업은 프로그래머라고 생각하거든요. 인공지능이 점점 발전하고 있잖아요. 결국엔 대부분의 직업을 대체할 거예요. 그런데 컴퓨터가 스스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게 되면 인류의 존재는 무의미해지거든요.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발전할 거니까. 결국 그 마지막 순간에 남아 있는 직업은 프로그래머일 수밖에 없는 거죠. 변호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은 없어지는 순간 인류 전체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최후의 직업이라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이 프로그램을 짤 줄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렇다고 지금 하는 것처럼 재능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억지로 공부시키고 차례로 점수 매기는 방식은 말고.
좋은 건 없죠.
‘게임이 좋은 것이다’라는 논지에서 ‘게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끌어내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거죠. 우리는 먹고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바로바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어요. 1970년대 사고방식이죠. 그런 생각을 가진 대한민국 학부모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다 망가지고 있어요. 좋지 않은 것도 해야 나중에 뭐가 되더라도 된다는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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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특성이죠. 게임엔 지금까지 가장 ‘진화’된 기술과 문화가 결합되죠. 그래서 가장 몰입되기 쉬운 문화예술 장르가 게임이에요. 미술작품을 보고서도 몰입될 수 있는 사람이 조금 있어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재능이 있다고 말하죠. 그들은 미술평론가가 되거나 직접 그림을 그려요. 소설을 읽고서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더 많죠. 소설은 훨씬 더 대중적이니까. 거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소설가나 문학평론가가 되고. 게임은 그보다 훨씬 더 발전된 ‘테크놀로지’라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몰입될 수 있는 거죠. 또 하나는 주변 환경이 현실에서 도피해 몰입할 무언가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죠, 대한민국 사회가 굉장히 힘들고 현실도피가 필요하기 때문에 각종 연예오락이 뜨고 있어요. 시청률도 높고 다들 건전하게 본 도 여주인공은 옥탑방에 살지만 재벌과 바로 사귀잖아요. 그게 요즘 뜨는 드라마의 기본 공식인데 사람들이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몰입돼서 열심히 보죠. 그런 면에서 제일 뛰어난 것이 게임이에요. 현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빠져들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게임 중독으로 인해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혹 그 사회가 잘못된 건 아닌지부터 확인해야지, 게임을 없앤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죠.
제일 좋은 방법은 대증요법이 아니라 원인을 찾아서 고치는 거죠. 원인은 경쟁이 너무 심하다는 데 있어요. 학부모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 대한민국의 엄청난 경쟁 환경을 해소해야죠. 아버지들이 밤 11~12시에 들어와서 잠자는 아이들을 보게 되는 현실을 바꿔야죠. 복지를 늘려 조금 놀고먹거나 빈둥거려도 죽지는 않는다, 1년 정도 실직 상태라 해도 깨끗한 방 한 칸에서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지킬 수 있다, 이런 보장이 필요해요. 매일 라면만 먹다가 죽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건 약간의 부작용인 거죠. 비생산적이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지만, 그중엔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도 나올 거예요.
규제를 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걸로 절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죠.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일본이 하는 만큼 한다, 유럽이 하는 만큼 한다 이럴 수는 있는데, 그걸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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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게임을 못하게 만드는 실효성은 없고, 부모님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효과는 있겠죠. (웃음) 물론 히틀러나 북한만큼 하면 정말로 원하는 만큼의 실효성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인터넷을 끊는다든가, 전체주의 국가처럼 정부가 허락한 회사만 공연·예술·게임·영화 등을 한다든가. 사실 머나먼 과거의 일도 아니에요. 한 30년 전만 해도 그렇게 살았는데 뭘 새삼스럽게. (웃음) 그런데 개방된 사회에서 그렇게 하면 여러 다른 문제들이 생기잖아요. 불가능해요. 그런 면에서 게임업계가 부모님들과 적절히 타협할 수는 있겠죠. 부모님들의 마음은 편안해지지만 실제로 게임을 하는 데 불편하지는 않을 수준의 규제 정도로.
기술적으로는 조만간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발전할 거예요. 에서처럼 목에 호스를 꽂지는 않겠지만. 예를 들어 눈을 감고 헬멧을 쓰고 있으면 전자기파를 잘 발생시켜서 뇌에 자극을 직접 주는 거죠. 시각적인 풍경이 떠오르고 감각을 느끼게 되는 거죠. 글쎄, 한 100년쯤 걸리려나? 시각장애인에게 시신경에 바로 자극을 줘서 구분할 수 있는 패턴 10개를 보여주는 것까지는 성공했거든요.
왜요? 파라다이스 아닌가? 어째서 암울하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그게 영화처럼 값싼 가격에 나오면 사회 체제 유지에 굉장히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 같은 하층민이 그런 걸 즐기면서.
#사실 이 대목에서 저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수많은 영화가 떠올라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주 앉은 사람은 게임산업은 나날이 규모가 커지고 있고, 그것은 선호나 취사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방향이라는 단호한 얘기만 쏟아냈습니다. 인류 사회는 그쪽으로 갈 것인데, 한국 사회가 어느 만큼 기여하는가의 문제만 남아 있다며.#
게임이 윤리적일 필요는 없죠. 영화를 예로 들어보죠. 사람들은 그런 영화에 금방 싫증 내요. 쿠엔틴 타란티노는 폭력의 미학을 추구하잖아요. 현실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달하는 거잖아요. 그 부조리를 드러내는 방법이 엄청난 폭력이나 잔혹함일 수도 있고 동화같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요. 그처럼 게임도 당연히 윤리적인 걸 따를 필요가 없죠. 그건 게임을 정말 하급문화로 치부하는 거예요. 사실 모든 문화예술 장르가 그런 과정을 거치긴 했죠. 책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거나 남녀 간의 야릇한 내용이 나오면 죄다 태우거나 잡아넣는 일, 옛날에 다 있었죠.
#송 대표에겐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1세대 개발자로서 일종의 아우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는 자리에서 회의가 끝나기 전에 바로 그 아이디어를 프로그래밍해 구현해 보였다는 등 무협소설이나 전설처럼 들리는 일화가 떠도는데요. ‘전설적 코더’라고 불리는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사진 김명진
저야말로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성과의 총화죠. 같은 또래로 김택진·김정주·이해진 같은 그룹이 있죠. 이 그룹이 삼성이라는 재벌 이후로 뭔가 대기업을 만든 유일한 케이스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요, 1990년에 카이스트에 입학했어요. 그때 카이스트가 대전으로 이사가는 중이어서 석사 1학년들만 대전 기숙사에 있었어요. 교수님들, 선배들은 다 서울에 있는데 동기끼리 1년 동안 같이 놀다시피 했죠. 학비도 기숙사도 무료인 학교에서 1년간 부담 없이 이것저것 해본 게 컸어요. 게다가 마침 전길남 교수님이 인터넷을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한국에 깔았고, 또 제가 그 실험실에서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배웠고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에 벤처 붐과 초고속 통신, 그러니까 대한민국 IT 역사가 흘러가는 중심점에 제가 딱 걸린 거죠.
약간씩 삐딱한 선을 탄 거죠. 뭔가 남들이 안 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선호가 있었어요. 그때 공부 잘한다 그러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박사를 따서 교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저는 때려치우고 나온 거죠.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그분들은 저보다 훨씬 똑똑해서 대학교 1학년 때 바로 중퇴했는데 저는 박사과정까지 다 다니고 중퇴했어요. (웃음) 에디슨이 이야기했잖아요. 천재는 99%의 노가다와 1%의 운으로 이루어진다고.
맞아요. 대부분 운이고 나머지는 노가다고. 한 1%쯤은 뭔가 천재적인 결정이 있었던 거라고 이야기해주세요. (웃음) 어쨌건 그때 를 만들기로 한 건 천재적인 결정이었죠.
잉여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창의성이 생기고, 창의성이 있어야 소프트웨어도 되고.
사람의 시간이 잉여인 거죠. 지금처럼 하면 안 되고요, 애들을 일단 학원에 못 보내게 해야 돼요. 애들이 빈둥빈둥 놀아야 새로운 것을 궁리하고 창의성도 나오지, 지금처럼 생각할 시간을 안 주고 18시간 풀타임으로 돌려봐요. 삼성전자에 들어가서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의 부속품은 되겠지만 거기서 무슨 창의가 나오겠어요.
그냥 놔두면 만들어지는 거죠. 뭘 해야 한다는 데드라인도 없고, 딱히 꼭 해야 하는 의무도 없이, 그냥 방치하는 거죠. 그런데 아마 못할 거 같아요, 대한민국 사회는.
그렇죠. 1년쯤 휴직하더라도 먹고살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있으면 마음 편하게 놀 수 있잖아요.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어려서 저처럼 가난한 환경에 있던 애들도 올라갈 수 있는, 계층 이동이 가능한 사회구조여야 하는데 한국 사회가 그게 점점 힘들어지는 듯해요. 2000년대 들어서부터 통로가 막힌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도 어딘가 굉장히 가난한 집에 똑똑한 아이가 태어났을지 모르는데 그 애가 서울대나 카이스트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막힌 게 아닌가 하는 거죠.
모든 아이들을 하나의 깔때기에 밀어넣으니 그 와중에 다치고 죽는 애들도 있고, 그 밑에 빠져나오는 애들은 한두 명인데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느냐는 거죠. 그 문제에 대한 정답이 없는 건 아니죠. 이미 많은 사회가 답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거죠. 노르웨이는 버스기사가 대학교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대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현대자동차에 20년 근속한 사람이 연봉을 6천만원 받는다고 하면 난리가 나요. 연봉 6천만원 받으려고 그 사람은 거기서 20~30년 일한 거잖아요. 그러면서 모두가 필요도 없는 어려운 수학을 배우는 척하며 불행하게 살고 있는 거죠. 이러면 한국 사회는 희망이 없어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합의가 절실해요. 국회의원 300명, 그거 하라고 뽑아놓은 거잖아요.
안 팔릴 것 같은데. (모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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