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뭘 먹으면 잘 체해요.”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다음날 김진숙 지도위원이 트위터 쪽지로 그렇게 입을 열었다.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그리고 많이 미안하지만 인터뷰한 것을 취소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보름 넘게 집단 단식을 하고 있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마음에 걸려서 한 얘기다. ‘그냥 함께 단식하는 게 훨씬 편하겠다 싶을 만큼 불편한 시간들’이라는 문장이 이어졌고 그런 상황에서 쌍용차지부 조합원이 아니라 자신이 인터뷰를 한 게 마음이 편치 않다는 바늘 같은 고백이 뒤를 이었다. 인터뷰라는 걸 거의 하지 않는 그의 전력과 인터뷰 약속 장소를 그가 살고 있는 부산이 아니라 대한문 앞으로 잡은 까닭을 짐작하는데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다행히 그 며칠 뒤 쌍용차 집단 단식이 끝났고 나는 얹힌 게 조금 내려가는 마음으로 김진숙과 주고받은 얘기를 정리했다.
‘체기’로 존재하던 김진숙이란 이름
한때 김진숙이란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체기’로 존재했다. 그 이름이 떠오르면 소화가 잘 안 됐고 잠자리도 가시방석처럼 불편했다. 그렇다는 사람들의 한탄과 괴로움을 나는 숱하게 들었다. 마침내 ‘희망버스’란 이름으로 그 체기를 덜어내려는 사람들도 기적처럼 목격했다. 그가 35m 높이의 크레인에서 309일의 고공농성을 벌이는 동안 내내 그랬다.
2년 전 11월의 어느 날 그가 크레인 위에서 무사히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안도했다. 제 살붙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체기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이후에도 그가 마음에 걸려 하는 수많은 ‘김진숙들’ 때문에 계속 체기가 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느낌이다.
김진숙의 이력은 치열한 수도자의 밥상처럼 단출하다. 직함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딱 한 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그게 다다. 21살에 대한조선공사(옛 한진중공업)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입사했으나 5년 뒤 해직됐고, 그 뒤 5년의 수배 생활과 두 번의 징역살이 그리고 기약 없는 복직 투쟁과 인간 깃발 같은 노동운동가로서의 일상, 그게 이력의 전부다.
김진숙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힘이 그를 추동하고 어떻게 자기 삶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것일까.
-인터뷰를 극도로 꺼린다면서요. 이유가 뭔가요?
=우선은 저를 이렇게 내세우는 게 싫고 제가 이렇게 드러나는 것도 본능적으로 싫어요. 또 하나는 인터뷰를 하면 제가 의도한 내용이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어요.
그는 자신이 등장한 인터뷰나 문학작품, 영화를 거의 안 본다고 말했다. 민망하고 왜곡된 느낌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말 나온 김에 희망버스로 김진숙을 알게 된 사람들을 대표해 그에게 진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본인은 김진숙을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체성이라고 할까요. 일단은 해고노동자나 노동운동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제 정체성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제가 해고노동자라는 겁니다. 벌써 28년 전 일인데 저는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날씨가 어땠는지 몇 시였는지 해고 통보를 전해주던 근로과 대리의 목소리가 어땠는지까지 다 기억이 나요 지금도. 그날 밤에 제가 어디서 뭘 했는지까지 기억이 생생하고요. 어떤 사람들이 “언제 해고됐냐” 물어서 “86년도 7월11일에 해고됐다” 그러면 지금도 날짜를 기억하냐,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럼 저는 기가 막히는 거예요. 당시의 모든 것이 생생하거든요. 지금도 가끔 한 번씩 그 꿈을 꿔요.
아직도 생생한 28년 전 해고 당일의 기억-근데 지금 하시는 일들이 본인이 복직을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복직이라는 게 단순히 일자리로 돌아가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측면도 크겠지만 그게 다라고는 생각 안 해요. 더 중요한 건 세상이 날 이렇게 내쳤다는 느낌이죠. 그날 이후로 세상, 그러니까 단지 한진중공업이라는 회사가 아니라 세상 전체가 그랬어요. 세상 전체가 철벽이 되어버린 거예요. 심지어 가족조차 “네가 뭐 잘못했으니까 잘린 거 아니냐. 그러니까 그런 거 하지 말라 그랬잖느냐” 그런 얘길 했으니까요.
-얘기는 그렇게 하시지만 희망버스가 가고 크레인 위에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할 때도 ‘나도 복직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안 하신 거죠?
=그런 생각은 조금도 안 해봤어요.
-그러면 본인은 자신을 해고노동자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론 대리전 같은 걸 치르는 거네요. 아니면 해고노동자들의 엄마처럼 보듬어주는 사람이든가.
=그런 거는 아니고요. 제가 아무리 간절해도 예를 들어 실향민들이, 이산가족들이 아무리 죽기 전에 내 아버지를 한 번 보고 싶고 고향 땅을 밟고 싶어도 그게 안 되는 구조가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인정하게 되는 거죠, 이제는. 저는… 복직하고 싶죠. 근데….
눈치 없이 다그치듯 내가 물었다.
-복직하고 싶으세요?
=(…목이 메어 말이 한참 끊김. 물끄러미) 새해가 밝아오고 추석 때 보름달이 뜨고 그러면 제 소원은 한결같아요. 복직이에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불가능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그런 게 있는 거예요. 사실 제가 정년이 이제 3년 남았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제가 이렇게 나이를 먹으면, 해가 바뀌면 ‘아, 내가 1살 더 먹었구나’ 이런 느낌보다 ‘이제 정년이 몇 년 남았네’ 이걸 먼저 헤아리게 됩니다.
5년 다니고 28년째 해직 중인 회사의 정년이 몇 년 남았나 헤아리고 산다는 대목에서 그 고통과 간절함에 내 무릎이 다 꺾이는 느낌. 흥건하게 가슴에 새겨 적었다.
-그런 생각을 하시는 줄 몰랐어요.
=그때 회사가 차라리 “니가 일을 못하니까 나가라” 그랬으면 이렇게는 안 살았을 것 같아요. “이 더러운 새끼들,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나” 이랬겠죠. 근데 일 잘한다 그러고 모범사원 표창장 주고 아침 조회 시간마다 “김진숙만큼만 일해라” 그래놓고…. 조선소 일 굉장히 힘들거든요.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한진에 있을 때는 몸무게가 64kg까지 나갔어요. 그러니까 먹지 않으면 일을 못해요. 그 무거운 철판을 짊어지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데 웬만큼 먹어서는 다리가 떨려서 올라가지를 못해요. 그걸 하루 종일 했다고요. 사실은 제가 지금 당장 복직을 시켜준다 해도 한 달이나 할까? 일이 힘들어서 못할지 몰라요. 근데 그냥 거기는 제가 돌아갈 자리예요.
“언니보다 ‘김 지도’란 호칭이 좋다”28년 동안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거기라고 생각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 있나.
-사람들은 김진숙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으세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예를 들어 한진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지긋지긋한 인간일 테고, 다른 한편에서 우리 조합원들은 아주 강한 사람, 강성인 사람, 포기하지 않는 사람, 뭐 다양한 시각으로 자기가 본 면만큼 보겠죠.
-그중에서 ‘지도위원’이란 호칭을 제일 좋아하시는 거죠?
=그게 제일 편해요.
-트위터나 오프라인에서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여자분들이 ‘언니’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좋아하지 않다기보다 그냥 ‘김 지도’라는 호칭이 가장 많이 불리고 편하니까요. ‘언니’ ‘누나’ 이런 표현들은 우리 조합원들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 호칭으로 부르는 건데, 잘 모르는 사람이 그러면 좀 그런 부분은 있죠. 운동하는 사람들의 버릇이기도 하지만 저는 술자리에서도 일부러 직책을 불러요. 흐트러지지 말라고.
-저는 김 지도님에게서 자기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매 순간 거의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제가 보기엔 호칭 문제도 그런 일부이고요. 당대의 싸움꾼 시라소니는 벽만 등지고 있으면 100명과 맞붙어도 이겼을 거라는 평가를 받았죠. 하지만 벽 없이 360도에 적이 있다 가정하고 싸우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거의 불가능하죠. 근데 김 지도님은 일상이 그런 것처럼 보이거든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제가 수배 생활을 오래 했거든요. 그래서 제 주변에 대한 경계가 늘 있어요. 그때는 커피숍을 가면 늘 후문이 있는 데를 들어갔어요. 버스를 타도 누가 뒤에 따라 타면 내려요. 양복 입고 구두 신은 사람은 일단 경계 대상 1호고. 그런 경계가 지금도 있어요. 전화를 하다가도 조금만 ‘지지직’ 소리가 나면 ‘이건 도청이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나요. 저는 그런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신념만 가지곤 안 되는 게 있어요. 아무리 자기 의지가 강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들도 자기 관리를 못해서 한순간에 도태되는 걸 저는 너무 많이 봤거든요. 남자들 같은 경우는 여성 문제, 술, 돈, 도박 이런 것들. 폐인 된 사람도 여럿 보고. 그래서 그런 거에 대해 저는 진짜 경계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단순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관리를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삶이 안 힘드세요?
=그거 힘들면 못하죠. 이제는 그게 늘 긴장하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기보다 그냥 되게 편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불편할 거예요.
-예를 들자면요
=따라다니면서 전기를 끈다든지 휴지를 한 마디 이상 못 쓰게 한다든지. 그럼 숨 막히지 않겠어요.
술 안 마시고, 운전 않고, 신용카드 안 쓰고…김진숙은 술도 안 마시고 운전도 안 하고 신용카드도 안 쓰고 밥은 5천원, 옷은 3만원 이하로 제한하는 나름의 규칙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10년 전 함께 일했던 두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엔 죄책감에 8년 동안 보일러를 틀지 않았고 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감는다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김진숙의 삶은 눈 동그랗게 뜨고 어떤 상황도 외면하지 않는 시간의 연속처럼 보인다.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려면 단계를 밟아 높은 곳을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만 말이 쉽지 그걸 극복한다는 건 당사자에겐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진숙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왜냐하면 저는 피한다고 생각해서 피해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칙으로 알았거든요. 대공분실에 끌려가 구타당할 때, 감옥에 갔을 때, 금전적 유혹이 있었을 때 모두 다요.
-피해지지 않는다 생각하면 포기하게 되지 김 지도처럼 맞서는 경우는 흔치 않죠.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은 뭔가요?
=우선 한진에는 어쨌거나 ‘열사’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거는 진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박창수 위원장도 내가 집에까지 찾아가서 위원장에 나가라 그랬거든요. 술 먹고 못하겠다 그러는 사람을 너 아니면 할 사람 없다며. 근데 그 사람이 죽은 거예요. 그런 일을 겪으면 그다음부터는 자기 삶이 아니게 돼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를 알잖아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그냥 새끼들 끼고 평범하게 살았겠죠. 근데 그렇게 안 산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근데 그 사람들 곁에 있다가 그 사람들이 앞에 그렇게 갔는데, 그럼 나 혼자 그렇게 못 가잖아요. 그렇게 가면 안 되잖아요. (한참 울음)
‘못 가고 말고요, 안 되고 말고요’ 속으로 끄덕이며 그를 따라 한참을 같이 울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된 느낌이랄까.
-사진을 찍을 때 ‘얼짱 각도’라는 게 있는데, 김 지도님은 심리적으로 정면만 응시하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따라하기 쉽진 않지만 얼짱 각도가 아니라 정면 응시만으로도 사람을 끌리게 한다는 건 매력 있습니다. 본인의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세요?
=뭘 하면 항상 꾸준히 하는 거 같아요. 별로 안 지쳐요. 먹는 것도 그래요. 뭘 먹기 시작하면 그것만 먹어요. 예를 들어 미역국이 한번 입맛에 들어오면 맛없을 때도 맛있다 생각하면서 미역이 떨어질 때까지 먹어요. 운동을 할 때도 수십 년을 그냥 계속 똑같은 운동을 하고요. 그게 저는 지루하지 않고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그런 게 아니었으면 크레인에서도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김진숙이 올랐던 크레인은 그의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을 버티다 스스로 목을 맨 곳이다. 그 끔찍한 트라우마조차 외면하지 않고 결국 김진숙은 벗의 주검이 놓여 있던 바로 그곳에서 309일을 견뎌낸 뒤 죄의식을 조금 덜어냈다고 말했다.
-‘129’와 ‘60’이란 숫자에 가위눌리는 것도 괜찮아지셨어요?
=네. 129일은 김주익 지회장이 버틴 날짜고, 60명은 그때 김주익 지회장이 마지막으로 보고 간 조합원 수였거든요. 늘 그 숫자에 치였는데 오히려 이제는 ‘309’일이라는 숫자가 미안하죠. 괜한 기록을 남겨서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는 거 같아서요.
“나라는 존재가 싹 잊혀지면 좋겠다”-앞으로 뭐하고 싶으세요?
=제주도에 가서 살고 싶기도 한데, 어디에 있든 그냥 부담 없이 알아보는 사람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 의지대로. 희망버스 얘기를 해도 김진숙 얘기는 별로 안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저란 존재가 싹 잊혀졌으면 좋겠어요.
-그거 불가능한 거 아시죠? (웃음) 오드리 헵번을 빼놓고 을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오드리 헵번이 잘 살았다, 행복했다 이러면 안 되나? (웃음)
인터뷰를 정리하며 그가 행복하게 잘 살길 두 손 모아 기원했다. 이번 인터뷰 때문에 민망과 왜곡으로 마음 불편해할 게 틀림없는 김진숙에게 시인의 입을 빌려 감사와 기원을 대신한다.
“거기 그냥 계시기 바래요/ 그 자리 오래 지키고 계시기 바래요/ 생각나면 이쪽에서 언제라도/ 찾아가겠습니다”(나태주, ‘좋은 사람’)
이명수 심리기획자, 정리 강선일 인턴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한덕수 “여야 타협부터”…쌍특검법·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시사
김건희가 허락 했을까요 [그림판]
조갑제도 “국힘은 이적단체”…여당은 ‘내란 가짜뉴스’ 대응 중
[속보] 국힘 비대위원장에 ‘친윤’ 권영세 내정…오늘 의총서 결정
‘내란 비선’ 노상원 구속 송치…쏟아진 계엄 질문에 ‘묵묵부답’
북 충돌 빌미로 계엄 노린 듯…노상원 수첩엔 ‘NLL서 공격 유도’
이승환, ‘구미 사태’ 후 공연 요청 줄이어…“7월까지 ‘헤븐’ 투어”
[속보] 민주 “한덕수 탄핵 절차 바로 개시, 내란 수사 타협 대상 아냐”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 불러 대책 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