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행복의 스펙화

등록 2013-06-27 16:39 수정 2020-05-03 04:27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일등 신랑감 박지성의 열애설이 화제다. 과거에도 톱스타와의 열애설이 몇 차례 불거졌지만 여성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던 듯하다. 박지성의 신붓감으로는 모자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듯하다. 상대는 미모의 여자 아나운서, 아버지는 부장판사 출신, 어머니는 미대 교수에 재력까지 갖춘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엄친딸이다. 이 정도면 ‘스포츠계의 레전드’로 건장한 체구, 성실함 그리고 상당한 재력까지 보유한 박지성에게 꽤나 어울리는 배필이라고 여겨지는 듯하다. 젊은 여성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여초 사이트에서도 이들의 열애가 군말 없이 인정(!)받는 분위기라고 한다.
결혼, 모든 스펙이 결집되는 장

일러스트레이션/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김대중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스펙’이라는 말이 횡행하기 시작했다. 성공하고 인정받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 스펙으로 압축되면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스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가 되었다. 인생의 주요 관문마다 스펙이 요구되고, 앞단계의 스펙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된다.

인터넷 남초 사이트에는 종종 “내 연봉은 ○○○○만원, 차는 ×××인데, 이 정도면 어떤가요?”라고 묻는 글이 올라온다. 여초 사이트에는 “예비신랑 연봉은 ○○○○만원이고, 입주할 아파트는 무슨 동 무슨 아파트 ○○평이에요. 이 정도면 괜찮은 건가요?” 같은 질문이 올라온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로 이어지는 대학 서열짓기·싸우기는 일종의 인터넷 놀이문화처럼 대중화됐다.

스펙은 이런 식의 생애주기를 가진다. 아이들은 동급 아파트 동급 평수대 친구들과 놀면서 자라다가 국제중 대 일반중을 시작으로 외고·특목고 대 일반고로 수준 차이에 따라 분리된 다음,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그리고 해외 유학파의 복잡한 수직 사다리 속으로 세분된다. 이어서 토익 몇 점, 각종 자격증 등 레테르로 개별화된 이들은 취업이라는 바늘구멍을 거치며 전문직·대기업·공무원 대 중소기업 혹은 청년실업자로 고착되고 이윽고 어느 동네 몇 평짜리 아파트에서 몇cc짜리 차를 몰면서 얼마짜리 핸드백을 든 남자 혹은 여자가 되어 다시 동급의 친구를 만나는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 재생산된다. 나머지는 탈락한다.

‘스펙사회’는 한국 사회 특유의 잔인한 경쟁 시스템의 산물이다. 이 시스템에서 개인의 존재 의미와 존재 증명은 모두 스펙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라는 존재 자체는 하등 중요하지 않으며, 나의 스펙이 나를 대신한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자신보다 학벌이나 직장 등에서 스펙이 처진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이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박지성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지만

과거라고 스펙을 안 따졌다면 거짓말이다. 대학 서열은 냉엄한 현실이었고 ‘기울지 않는 결혼’이 이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드러내놓고 스펙 따지기를 해서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건 염치없는 짓이라는 거리낌의 감각 정도는 있었다는 것이다. 맞다, 그건 위선일지 모른다. 그래도 위선은 한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은 보여준다. 그 사회의 대중이 아직은 선이나 염치 따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에 합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품위를 유지하려면 아무튼 선의 탈을 써야만 했던 것이니, “위선은 악이 선에게 보내는 경배”라는 말은 이래서 나왔으리라.

하지만 우리 사회는 위선을 욕하면서 염치를 버렸다. 염치를 버리고 선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한없이 가벼워졌는데, 그래서 이제 모두 스펙이 아니면 말할 게 없는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당신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위선으로 깎아내려지자, 사회는 이제 ‘너의 스펙을 보여다오’라고 요구해오고 있다. 이런 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래선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