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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나갑니다 감독” 류현진의 포기가 일깨운 교훈



‘투혼’은 갑이 을에게 요구하는 ‘혹사’의 다른 이름

최동원·염종석의 불운했던 말년, 젊은 투수들 반복 말길
등록 2013-06-15 08:55 수정 2020-05-03 04:27

지금 한국인의 슈퍼스타는 단연 류현진이다. 2013년의 류현진은 박찬호·박지성·김연아의 시대를 잇는 국민 체육인의 왕좌를 물려받았다. 류현진은 한국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열광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고 5월29일 무사사구 완봉승을 기록하던 낮 시간, 전국의 사무실 파티션 안에서는 숨죽인 열광이 이어졌다. 메이저리그 데뷔 11게임 만에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경기에서 리그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는 팀을 상대로 2안타 무사사구 완봉승을 기록하던 5월29일은 바야흐로 류현진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는 날이었다.
쉬운 일 아니었을 출전 불가 통보
닷새 뒤인 6월3일 류현진은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 경기 선발로 예고돼 있었다. 이전 경기 완봉승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갈 것이라는 팀 안팎의 기대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류현진은 스스로 경기 직전 출전 불가를 코칭스태프에게 알렸다. 그 전 경기에서 타자의 타구에 맞은 발등의 부기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 경기에서 4회에 발등을 맞고 난 뒤에도 나머지 5이닝을 완벽하게 처리했으므로 큰 부상이 아니라 생각될 수도 있었고 선발진이 무너지고 최하위에 빠진 팀의 사정을 감안하면, 아시아에서 온 신인투수의 경기 출전 불가 통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일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경기 시작 4시간 전까지도 선발투수를 류현진으로 표기해둔 상태였다. 팀도 감독도 현재 팀의 가장 확실한 선발투수인 류현진의 출전을 쉽게 포기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류현진은 자신을 보호했고 감독은 류현진의 선택을 존중했다. 결국 그 경기는 마이너리그에서 급히 올라온 맷 매길이 투입되었고 다저스는 패배했다.
류현진의 경쟁력은 이것이다. 아시아 변방 리그의 ‘듣보잡’ 에이스는 메이저리그 계약 초부터 ‘마이너리그 강등 불가’ 계약을 성사시켰고, 데뷔하자마자 주전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으며, 완봉승 직후의 게임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 출전 불가를 감독에게 통보했다. 주변 환경과 야구의 ‘갑’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는 캐릭터를 스스로 구축한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장난을 치고 세리머니를 주고받는다. 멘털도 몬스터급이다.
한국 프로야구 꼴찌팀 한화 이글스의 송창식은 버거병(폐쇄성혈전혈관염)으로 손가락 신경이 마비되는 증상을 겪은 이후 눈물겨운 재활을 통해 돌아온 투수다. 그는 지금 한화 불펜의 핵심 투수다. 마무리든 중간계투든,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팀이 위기에 빠지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우연히 한화의 TV 중계 채널을 보면 언제나 송창식이 던지고 있다. 6월6일 현재 송창식은 한화가 치른 48경기 중 26게임에 등판했다. 최근 일주일간은 6번 마운드에 올라 6.1이닝 동안 131개의 투구를 했다. 보통 선발투수들의 1게임 투구 수보다 훨씬 많고 선발투수들이 1게임을 던진 뒤 5일간은 푹 쉬어야 할 상황이나, 송창식은 일주일 내내 불펜에 대기하면서 몸을 풀고 등판해 쉴 틈 없이 공을 던졌다. 꼴찌팀 한화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다저스 또한 메이저리그 꼴찌팀이다. 김응용 감독도 최고의 스타 감독이었지만 다저스의 돈 매팅리 감독도 슈퍼스타 출신이다.
일주일 새 6번, 131구 던진 한화 송창식
한국 야구에서 전설이 된 투수들의 기록은 대부분 혹사의 역사였다. 최동원은 한국시리즈에서 4승1패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지만 그 혹사로 불과 32살에 은퇴해야 했다. 신인 시절 혜성같이 나타난 롯데의 염종석은 데뷔 첫해 팀을 우승으로 이끈 뒤 은퇴할 때까지 누더기가 되도록 어깨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한화의 송진우는 1992년 19승과 17세이브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하는,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6월5일, 39살의 NC 다이노스 손민한은 1378일 만에 돌아와 승리투수가 되었다. KIA 타이거즈의 투수 최향남과 LG 트윈스의 투수 류택현은 우리 나이로 43살이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의 제이미 모이어는 한국 나이 50살에 승리투수가 되며 야구선수가 평생 직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선수는 다른 무엇 이전에 한 명의 직업인이다. 짧은 계약 기간에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하는 야구감독의 실적용으로 쉽게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감독도 선수의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다. ‘투혼’이란 대부분 ‘갑’이 ‘을’에게 요구하는 혹사를 포장하는 단어다. 최근 한국 야구는 나름의 투구 수 관리와 등판 일정 조정 등으로 선수 보호에 노력을 기울이지만, 여전히 야구장의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는 일부 감독들의 무리수가 보인다. 송창식은 “예전 힘들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혹사가 아니다”라고 매우 ‘한국적인’ 인터뷰를 했지만 류현진의 등판 포기 결정이 말해주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들을 보고 싶다.
김준 칼럼니스트·사직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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