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것이 좋았다. 시골에서 달 보고 풀 보고 자란 탓인지도, 위로 4명이나 되는 언니들 치장을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모른다. 그냥 좋았다. 어릴 적에는 그것이 악기라 생각했다. 수학 학원, 영어 학원은 안 다녀도 피아노 학원은 다니게 해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입시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갑자기 전환한 이유는 글쎄, 미술이 좋아졌다. 연주된 음악도 칠해지는 색도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니 그리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다음해 미대에 들어갔다.
색의 조합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
하지만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내가 그림을 못 그리는구나 싶었다. 마지못해 졸업은 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데 디자인 학원이 보였다. 구두 디자인 학원이었다.
“왜 구두 디자이너가 되었나요?”라는 질문에 김자영(38)씨는 이리 답했다. 인터뷰를 하려고 카페를 찾아가는 길, 그녀는 손톱만 하게 보이는 달을 찾아냈다. “저 달 너무 예쁘지 않아요?” 아래로는 인공 불빛이 혼잡하고 위로는 건물 끝머리가 보이는 서울 홍익대 앞 거리, 거뭇한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색을 찾아내고, 가죽을 매만지는 것이 좋았다. 수천, 수만 가지 색 중 하나를 찾아낸다. 색이 같아도 어떤 가죽을 쓰느냐에 따라 구두는 수백, 수천 가지 모습을 띠었다. 색을 가지고 노는 것. 그 색의 조합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 그녀가 원하던 일이었다. 구두를 디자인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 일이 재미있으니까 이렇게 버티며 하지요. 아니면 못해요.”
첫 직장은 유명 기업의 하청이었다. 하청공장은 구두공장이 밀집한 서울 성수동에 있었다. 그 뒤 10년 동안, 자영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수동에서 보내게 된다.
자영씨를 따라 성수동 구두공장 골목으로 갔다. 띄엄띄엄 있는 가죽 가게, 구두굽 가게가 아니면 이곳에 구두공장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낡은 건물이 즐비한 골목. 대부분의 봉제공장이 지하나 천장이 낮은 2층에 숨어 있듯, 구두도 이 낮고 낡은 건물들 안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철제문을 열자, 구두공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색색의 구두가 나열된 선반이었다. 화려한 빛깔의 구두가 어둡고 기름때가 찌든 작업 공간에서 도드라졌다. 작업장은 한적했다. 안쪽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몇몇 사람들의 부산한 기척이 들릴 뿐이었다. 원래는 본드 냄새, 가죽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지만 요즘은 일이 없다고 했다.
일은 계속 줄어간다. 성수동 공장들은 중국에서 만든 값싼 신발에 밀려 일감을 잃어갔다. 자영씨는 이곳 공장의 구두를 만들지만, 직원은 아니라고 했다. 공장은 경력이 1년도 되지 않은 디자이너 두 명을 두고 있다. 이들 월급을 다 합쳐도 200만원이 겨우 넘는다. 회사는 자영씨같이 경력이 쌓인 디자이너를 고용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자영씨는 프리랜서다.
바른말을 하니 더 줄어든 일감
물론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까닭이 그것만은 아니다. 그녀가 좀 변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시키는 대로 일했다. 밤 12시를 넘겨 일이 끝나도, 빨간 날 쉬지 못해도, 그럼에도 야근수당 같은 것은 구경조차 못해도 다들 그렇게 일하니까 하고 참았다. 하지만 시간은 가고 경력이 쌓이는 만큼 생각도 커졌다. 마침 2004년 영국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 친언니가 살고 있었다. 영국은 성수동 골목과 달랐다. 사람들이 원하는 노동조건을 당당히 말하며 살았다. 사장 말이 법이고, 욕설과 명령조 말투가 일상인 거친 사내들의 공장과는 달랐다.
공장 구석에 앉아 종일 가죽을 인두질하던 노동자는 한 달이 되면 현금으로 월급을 받아다가, 공장 옆 경마장에 가서 그 돈을 뿌렸다. 돈을 다 잃으면 다시 돌아와 일을 했다. 초등학교를 나와 맞아가며 어깨너머로 가죽 다루는 일을 배운 사내들이 본드 냄새에 머리가 나빠지며 일하는 곳. 간혹 성실하고 운이 좋아 돈을 모은 이들이 자신의 공장을 세웠다. 그 공장 안에서 싸울 때 가죽 자르는 커다란 가위 날을 치켜드는 사장과 지내던 자영씨였다. 그런 그녀가 영국의 노동자들을 보며 ‘어라?’ 했다.
그리고 4년 뒤, 한국에 돌아와 다시 ‘어라?’ 했다. 노동조건이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구두공장들은 ‘몇 년을 못 버틴다’ 말을 달고 살았다. 사장들은 더 각박해졌다. 월급은 줄어들었다. 자신의 10년 전 월급보다 훨씬 못한 액수의 돈을 받고 어린 디자이너들이 회사에 들어왔다. 일이 없으면 그날 바로 ‘나오지 마’ 해고 통보를 했다.
머리가 커버린 자영씨는 그리 못 살았다.
“해고를 이런 식으로 통보하시면 한 달치 월급을 주셔야 하는데요.”
“뭐? 한 달치? 내가 너 앞으로 성수동에서 일 못하게 할 수도 있어.”
“네, 제발 그렇게 해보세요.”
노동부에 신고를 하고 퇴직금을 받아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다른 디자이너들은 놀라워했다. 퇴직금은커녕 밀린 월급조차 받지 못하고, 자르면 잘려갔다. 자영씨는 후배들에게 할 말은 하고 살라고 했지만, 해고가 만연한 공간에서 노동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디자이너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자영 언니가 퇴직금은 주셔야 한다고 했어요”라고 괜히 한마디 했다가 욕만 먹고 돌아오는 후배들도 있었다. 답답했다.
답답한 것은 그녀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없는 일감이 바른말을 하니 더 줄었다. 디자이너들은 중국으로 일을 하러 갔다. 생산비가 싼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놓고, 사장들은 한국에서 디자이너를 불러다 썼다. 체류 비용을 아끼려고 보통 보름 단위로 일을 시켰다. 한 달치 일을 보름 만에 해야 했다. 디자이너들은 중국으로 가 보름 동안 좀비처럼 일하고 돌아왔다. 그 일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불안이 밀려오는 요즘이다.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를 보았을 때그럼에도 자신이 만든 구두를 신을 때, 그 감촉이 자영씨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 길을 가다가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를 보았을 때의 설렘이 그녀를 붙잡는다. 물론 자신의 작품에 다른 회사 로고가 붙어 있기도 한다. 외국의 유명 브랜드 신발을 책상에 올려놓고 베껴 그리는 회사가 만연한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의 디자인도 금세 베껴졌다. 모든 것이 잘못돼 있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힘없는 개인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새 구두가 나오면 그 부조리함을 금방 잊고 웃는다. 어제 사장의 욕설을 듣고, 밀린 월급 걱정을 하고, 밤새워 일하다가 이 일을 때려치울까 고민해도, 오늘은 갓 나온 구두를 보며 웃는다. 구두 디자이너 자영씨와 그네들의 일상은 그리 반복된다.
글 희정 기록노동자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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