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러시아에서 수만 명 규모의 시위는 그리 낯익은 장면이 아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8년 통치 기간(2000~2008년)에는 확실히 그랬다. 간혹 시위가 있어도 시위대의 대부분은 옛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인들이었다. 이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푸틴이 다시 대통령에 당선돼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지금, 모스크바에서는 반푸틴 시위가 일상이 돼 있다. 시위대의 구성도 과거와는 다르다. 노인들이 꽤 눈에 띄지만, 대다수는 젊은이들이다. 발단은 2011년 12월4일의 두마(러시아 하원) 선거였다. 선거 결과, 푸틴이 이끄는 집권 여당 통합러시아당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결과가 민심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광범한 선거 부정의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끈질긴 반푸틴 시위 이끄는 탁월한 선동가
사실 과거에도 러시아의 선거 시스템이 특별히 믿을 만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다. 집권당의 무리한 부정행위가 4개월 뒤(2012년 3월) 대선에서 푸틴을 당선시킨다는 예정된 결말로 나아가려는 수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광대극을 그냥 보아 넘겨줄 수 없을 정도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푸틴 체제에 대한 환멸과 반감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선 다음날부터 모스크바 시내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가 조직한 것도 아닌데,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그러더니 총선 뒤 첫 토요일인 2011년 12월10일에는 러시아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모스크바의 볼로트나야 광장에는 3만 명이 운집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치범 석방, 총선 무효화, 선거관리위원장 해임, 선거 부정 공개 조사, 야당 활동의 법적 보장과 정당-선거 제도 개혁, 새로운 총선 실시”를 요구했다.
대규모 시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겨울은 광장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거리를 행진하기에 알맞은 철이 아니다. 그런데도 2012년 봄이 다 되도록 시위가 계속 이어졌고, 그때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마침 2011년은 ‘아랍의 봄’에서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의 운동,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으로 이어지는 전세계적 저항운동의 해였다. 러시아의 반푸틴 시위는 마치 이 반란의 해의 대미를 장식해주는 듯 보였다.
반푸틴 시위가 거듭될수록 정권의 대응도 거세졌다. 특히 매번 시위대 맨 앞에 서서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는 한 인물이 집중적으로 탄압 대상이 되었다. 겉모습만 보면, 서유럽의 극우파 스킨헤드를 연상시키는 민머리 젊은이다. 하지만 탁월한 연설 솜씨와 현장 지휘 능력으로 시위 군중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지도부로 인정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세르게이 우달초프. 불과 35살(1977년생)의 좌파 운동가다.
물론 우달초프 말고도 시위를 이끄는 명망가는 많이 있다. 정치색도 다양하다. 현재 시위 지도부의 역할을 하는 조직은 광범한 반푸틴 세력 연합체인 ‘다른 러시아’인데, 본래 이 조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세계 체스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다. 그는 ‘시민연합전선’이라는 반푸틴 운동단체를 만들어 정치운동가로 변신했다.
‘다른 러시아’의 또 다른 주요 지도자로는 ‘민족-볼셰비키당’을 이끄는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를 들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결합시킨 독특한 ‘민족-볼셰비키주의’의 주창자다. 자유주의자이고 민족주의자에다 좌파까지, 참으로 다채로운 세력들이 ‘푸틴 체제 반대’를 위해 ‘다른 러시아’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중에 젊은 좌파 우달초프도 있다.
스탈린 초상 앞에서 결혼사진 찍은 시절
우달초프는 가계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의 증조부는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당의 저명한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달초프는 21살 대학생 시절부터 좌파 조직에서 활동했다. 옛 소련 공산당에 뿌리를 둔 여러 정당들 중에서 유독 스탈린주의 성향이 강한 공산주의노동자당의 청년조직 ‘붉은 청년 전위’(AKM)였다. 이 무렵 찍은 우달초프 부부의 결혼사진이 걸작이다. ‘푸틴은 자본주의 앞잡이’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든 젊은 부부 뒤에 커다란 스탈린 초상이 걸려 있다. 다른 나라 좌파라면 누구나 ‘이런 똘아이들!’ 하고 실소할 만한 장면이다.
그렇다고 이 모습이 곧 지금의 우달초프는 아니다. 그도, AKM도 지난 10년간 적잖은 변화를 겪었다. AKM은 2004년 공산주의노동자당과의 관계를 끊었다. 한때 제1야당 러시아연방공산당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결국은 기존 좌파 정당 바깥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보리스 카갈리츠키 등 신좌파 지식인들이 세계사회포럼의 러시아판으로 기획한 러시아사회포럼이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AKM은 사회포럼에 모인 재야 좌파들과 함께 ‘좌파전선’이라는 새 연합 조직을 만들었다. ‘이슬람 마르크스주의’를 주창하는 무슬림 지도자 게이다르 제말이나 잘나가는 경영인이자 좌파 정치가이기도 한 일리야 포노마레프 같은 독특한 인물들이 새 조직에 합류했다.
좌파전선은 ‘분노의 날’이라는 정기 집회를 꾸준히 열어 이름을 알려갔다. 좌파전선의 지속적인 활동은 2011년 폭발하게 될 반푸틴 대중투쟁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달초프는 수십 차례의 연행 기록을 남겼다. 그렇다고 폭력시위를 벌인 것은 아니었다. 우달초프가 선동가인 것은 맞지만, 그가 선동하는 것은 철저한 비폭력 투쟁이다. 어떤 점에서는 가죽 점퍼와 청바지를 입은 간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시위 주동 혐의로 투옥됐을 때도 그는 단식농성으로 정권에 맞섰다.
우달초프의 정치 노선도 우스꽝스러운 결혼사진을 찍던 시절과는 분명 다르다. ‘극좌파’라는 분류와 달리, 그는 자신을 때로 ‘사회민주주의자’라 부른다. 한편으로는 소비에트(평의회)를 건설해서 민중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스탈린주의 체제보다는 오히려 스웨덴 복지국가를 더 닮은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 러시아 사회에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단언하지만, 그러면서 또한 그 혁명은 10월 혁명 같은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라는 단서를 붙인다. 부패하고 억압적인 푸틴 체제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혁명이 먼저라는 것이다.
‘재스탈린화’ 주장하는 러시아연방공산당
서유럽식 노선 구별법으로 보면, 혼돈 그 자체다. 사회민주주의니 레닌주의니 하는 익숙한 범주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달초프와 좌파전선이 소련 붕괴 뒤 지난 20년 동안 러시아 사회에 명멸한 좌파 조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진지한 세력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반푸틴 시위 현장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좌파전선은 집회장에서뿐만 아니라 제도정치에서도 이런 인정을 받으려 한다. 당국이 이들을 합법 정당으로 인정해주길 한사코 거부하고 있지만 말이다.
좌파전선 같은 신생 좌파 세력의 제도정치 진입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만큼 러시아의 기존 좌파 정치 지형이 불모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 이후 줄곧 제1야당 자리를 유지하며 제도정치 내에서 좌파의 대표자 역할을 해온 것은 ‘러시아연방공산당’이다. 대선 때마다 후보로 출마해 옐친, 푸틴과 겨룬 겐나디 주가노프가 20년 가까이 이 당을 이끌어왔다. 이 당은 2011년 총선에서도 19.19%를 득표해 푸틴의 통합러시아당에 이은 제2당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당을 보편적인 좌파 기준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점이 많다. 러시아연방공산당은 당의 이념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애국주의를 내세운다. 또한 이들의 주된 지지 기반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다. 급속한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촌 지역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인데, 아무튼 도시 노동자계급이 좌파 정당의 주된 지지층이라는 상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가노프는 2010년 스탈린의 생일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러시아 사회의 재스탈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러시아연방공산당과 두마 내에서 경쟁하는 또 다른 좌파 정당이 있다. 2006년 창당한 ‘정의러시아당’이다. 정의러시아당의 이념은 대체로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좌파전선의 지도자이기도 한 일리야 포노마레프가 이 당의 두마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 당은 지난 총선에서 13.24%를 득표해 러시아연방공산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고, 도시 지역에서는 러시아연방공산당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어찌 보면 상당한 발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정의러시아당에도 러시아연방공산당만큼이나 께름칙한 측면이 있다. 정의러시아당 창당 초기에 이 당을 이끌던 세르게이 미로노프는 푸틴 정권과 적극 협력했다. 마치 관제 야당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푸틴의 장기 집권 야욕이 노골화하자 협력 관계는 중단됐다. 최근에는 러시아연방공산당보다 정의러시아당이 반푸틴 시위에 더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고, 미로노프가 대선에 정의러시아당 후보로 나가 푸틴에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투적 야당으로서 폭넓은 신뢰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잿더미 위에서 예기치 않게 등장한 새 세대
흥미로운 것은 좌파전선이 잠재적 경쟁 상대인 러시아연방공산당, 정의러시아당에 대해 적극적인 협력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달초프는 올해 대선 때 러시아연방공산당 주가노프 후보의 선거운동본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주가노프가 우달초프를 러시아연방공산당의 차기 지도자로 지명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돈다. 그러면서 우달초프는 정의러시아당의 미로노프, 포노마레프와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달초프가 러시아연방공산당과 정의러시아당을 설득해서 10월에 있을 칼리닌그라드 시장선거에 러시아연방공산당 후보를 반푸틴 좌파 단일 후보로 출마시킨다는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것은 기존 좌파 정당들과의 연합 전선을 통해 새로운 좌파 정치 흐름과 광범한 좌파 유권자층 사이의 접촉면을 확보하려는 시도인가? 아니면 우달초프로 상징되는 새로운 좌파 흐름조차 결국 러시아 정치의 아수라장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인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지난 한 세기의 비극으로 좌파의 모든 긍정적 자산이 붕괴된 것처럼 보였던 나라에서도 새 세대의 등장과 함께 예기치 못한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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