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인 의미의 추리소설은 최근에 나오는 범죄소설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묵시적 약속을 지키며 다양한 트릭을 등장시키는 초기의 추리소설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동기에 대한 묘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모든 문이 안에서 잠긴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어떻게 범인이 탈출했나 하는 것이지, 어째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나에 관한 것은 아니다. 동기는 그저, 돈 문제 혹은 치정 문제 등으로 간략히 설명될 뿐이다.
부유한 남편 둔 아내의 두 비밀
그러나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이름을 딴 상까지 존재하는 에도가와 란포의 1920년대 소설 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물론 이 책에도 1인3역과 같은 놀라운 트릭과 반전이 존재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세 개의 시나리오가 모두 기묘한 형태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사랑으로 인해 벌이는 범죄는 애초부터 증오에서 출발한 범죄보다 결코 적지 않다.
1920년대 일본. 10년 연상의 회사 중역과 결혼생활을 하는 오야마다 시스코.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남편과는 원만한 사이.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감탄할 만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옛날 풍의 희고 갸름한 얼굴에 눈, 코, 입, 목덜미, 어깨 등 모든 선이 우아’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온화해 보이는 남편이 사실은 밤마다 승마용 채찍으로 시스코를 때리는 변태성욕자라는 점. 오랫동안 계속된 남편의 버릇은 그녀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이제는 그녀가 먼저 남편의 손에 채찍을 쥐어주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둘째는 집요하게 시스코를 쫓아다니는 옛 애인의 존재다. 결혼 전 여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녀는 히라다 이치로라는 청년과 사귄 일이 있다. 잠깐 만나고 이별을 통보했지만, 그의 집착은 멈출 줄을 모른다. 깊은 밤에 집 밖에서 서성거리거나 때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협박장을 보내오기도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스토커가 된 것. 시스코는 그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떤다.
그러던 중 때마침 경제계의 큰 변동으로 파산한 아버지가 사망해 그녀는 고향마을을 떠나고 잠시 히라다의 손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참담한 생활을 하는 시스코와 어머니 앞에 같은 고향 출신의 실업가 오야마다 무쓰로가 나타난다. 오야마다는 두 사람을 극진히 보살피다가 결국 시스코에게 청혼을 한다. 그렇게 현재의 남편을 만난 시스코는 도쿄로 이주해서 살게 된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시스코는 오에 슌데이라는 추리소설 작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다름 아닌 히라다 이치로였다. 시스코가 파산한 아버지를 따라 행방을 감춘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히라다는 우연한 기회에 필명으로 소설을 한 편 썼다가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몇 권의 책을 출간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그는 시스코를 찾아나선다. 그녀가 받은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변할 줄 모르는 그의 복수심으로 가득한 협박장이었다.
남편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편지의 내용은 시스코를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선 히라다는 그녀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정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적은 물론 침실에서 벌어지는 남편과의 내밀한 일까지 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남편을 먼저 죽이고 그녀까지 살해하겠다고 예고를 한다. 불안에 사로잡힌 시스코는 히라다의 라이벌 격인 소설가를 찾아가서 의논을 한다. 그가 이 책의 화자인 사무가와다.
오에 슌데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쓰던 히라다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 역시 추리소설가인 사무가와는 그동안 히라다가 쓴 책의 내용을 참고해 그의 행적을 찾아나선다. 히라다가 시스코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한 방법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몰래 그녀의 집에 잠입한 뒤 천장 위에 숨어서 방을 내려다본 것이다. 사무가와는 시스코의 침대 위에서 히라다가 흘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장갑 단추를 발견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망설이는 사이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다. 시스코의 남편이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소설에는 가능한 세 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된다.
시나리오 1: 복수심에 불타는 히라다가 시스코의 남편을 살해한 경우. 가장 단순한 결론이다. 보답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사랑이 질투와 집착으로 변질되고 결국 연인이 가장 아끼는 존재를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살해된 이후에 갑자기 뚝 끊기는 협박장, 그리고 남편의 서재에서 발견된 일기장과 히라다의 글씨를 연습한 흔적은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시나리오 2: 남편이 자작극을 벌이다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 시스코의 걱정과 달리 남편은 그녀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내를 때리며 극단의 쾌락을 추구하던 그는 히라다의 책을 사다 읽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트릭(천장 위에서의 염탐)을 시도해보거나 필체를 흉내 내본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협박장을 보낸 것도 남편이었을까. 이것이 맞는다면 그는 담벼락에 서서 히라다 행세를 하다가 추락사한 것이다.
시나리오 3: 시스코가 옛 애인의 소행, 혹은 남편의 자작극을 가장해서 남편을 살해했을 경우. 오에 슌데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쓴 것은 히라다가 아니라 시스코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결론이다. 사무가와의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려고 스스로 만든 협박장을 보여주고 옛 애인이나 남편이 한 일로 돌린 것이다. 남편을 살해한 것은 물론 사무가와와 함께 살기 위해서다. 사무가와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시스코를 추궁했고, 결국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과연 진실은 세 가지 중 어느 것일까. 자신 있게 시스코에게 따져묻던 사무가와는 막상 그녀가 자살하자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의혹에 휩싸인다. 스스로도 시스코를 향한 욕망에 굴복했던 그는 시스코가 자살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랑 속에 존재하는
독자의 처지에서는 어떤가. 누가 범인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 가지 시나리오가 모두 설득력 있고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보면 증오에 의한 것 못지않게 보답받지 못한 애정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체포된 범인이 피해자에 대한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흔히 보는 일이다. 에도가와 란포가 말한 ‘음울한 짐승’은 모든 사랑 속에 존재하는, 언제든지 극단적인 형태로 돌변할 수 있는 면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강력하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범죄를 일으키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 목록에서도 사랑을 빠뜨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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