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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가장 큰 잘못이라고?

한 사건 놓고 4명이 서로 다른 거짓말하는 이언 피어스 <핑거포스트, 1663> 어쩌면 거짓말보다 더 나쁜 것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범죄
등록 2012-07-14 13:40 수정 2020-05-03 04:26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1974년의 미스터리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한 장면. 용의자들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한겨레 자료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1974년의 미스터리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한 장면. 용의자들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한겨레 자료

대학 시절, 변호사인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 재판이 있어서 법원에 갔다가 목격한 일이라고 했다.

무슨 혐의인지 구속된 채 재판을 받던 피고인은 재판장에게 장황하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요지는 검사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다. 조사받을 때 자백하고 공범에 대해 아는 것을 털어놓으면 용서해주겠다고 해서 묻는 말에 다 그렇다고 했는데 검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기소했다며 항의했다고 한다.

검사가 피고인에게 각서를 쓰다?

여기까지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강압이나 고문을 당한 것도 아니고 회유당해 자백을 했다는 것은 무죄를 다투는 피고인이 할 수 있는 표준적인 방어 방법이다. 문제는 다음에 나온 피고인의 말. 그는 믿기 어려운 얘기를 털어놓았다. 검사가 자신에게 각서를 써주었다는 것이다. 자백을 권유하는 검사에게, 혐의를 인정하면 그것을 증거로 기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대한민국 검사를 그렇게 못 믿느냐고 하며 ‘자백하면 절대 기소하지 않겠다’고 쓰고 도장을 찍어주었다는 것이다.

조용하던 법정은 아연 긴장으로 가득 찼다. 소송 기록을 읽으며 자기 재판을 준비하던 변호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이 황당한 주장을 하는 피고인을 쳐다봤다. 재판장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검사 쪽으로 향했다. 정말 조사 과정에서 피고인에게 각서를 써주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당황한 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재판장님, 피고인의 말은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 각서는 제가 잠시 회의가 있어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피고인이 책상 위에 있던 제 도장을 훔쳐서 찍은 것입니다.”

검사는 업무상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할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 있다. 그때마다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고 집어넣고 하기 힘들기 때문에 책상 위에 인주와 도장이 놓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과연 조사를 받던 피고인이 몰래 종이에 도장을 찍어서 각서를 위조한 것일까. 법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피고인에게 향했다.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듯하던 피고인은 작심한 듯 재판장을 향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재판장님, 검사님이야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린 각서는 있지도 않습니다. 검사가 어떻게 조사받는 사람에게 각서를 써주겠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각서가 있다고 하니까 도장을 훔쳐서 찍은 것이라고 둘러대지 않습니까? 그것만 보더라도 저 검사님은 아무 망설임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재판장은 물론 법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얼굴이 벌겋게 된 검사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허공만 쳐다봤다고 한다.

진상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해석은 이랬다. “실제로 그런 각서가 있었을 거야. 어떤 연유에서든 검사가 각서에 도장을 찍어줬고, 피고인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얘기를 했겠지. 하지만 이미 검사가 피고인이 도장을 훔쳐서 찍었다고 주장한 마당에 각서를 꺼내봤자 구속까지 된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피고인이 ‘이왕 이렇게 된 거 망신이나 주자’라고 생각해서 원래 각서가 없었다고 주장한 것 같아.” 그럴듯한 추측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피고인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었을까?

사실은 오리무중에, 추측만 남아

진실과 뒤섞인 거짓말은 실제 일어난 일의 진상을 완전히 뒤흔들어놓는다. 이언 피어스의 은 하나의 사건을 놓고 4명의 화자가 하는 설명을 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조금씩 거짓말을 한다. 독자는 그들의 말을 믿고 따라가다가 점차 수수께끼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의 배경은 1663년의 영국.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10년에 걸친 내전이 끝나고 공화파에 의해 처형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 왕권이 안정되지 않아 각지에서 내란과 음모가 횡행하던 시기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인물들이고 그들이 한 일도 대부분 사실이다. 자연과학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인 만큼 미신에 가까운 관행과 이성에 따른 새로운 발견이 공존하는데- 위경련을 치료하려고 비소를 복용한다거나 염증이 생긴 눈에 말린 개똥을 바르는 황당한 일도 있지만 혈액의 순환을 발견하고 치료를 위해 수혈을 하기도 한다- 마치 역사책을 보는 듯 책의 내용이 그대로 사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중심이 되는 사건에 대한 설명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옥스퍼드대 교수인 그로브 박사의 사망을 놓고 시작된 얘기는 점차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둘러싸고 열강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역사적 음모로 확장된다. 4명의 화자는 각자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지만, 애초에 완전한 진실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출신 의사인 마르코 다 콜라는 얘기를 시작하며 “나는 이 글에서 많은 것을 생략하겠지만, 중요한 사항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겠다”라고 하는데, 그가 생략하는 ‘중요하지 않은 사항’에 많은 진실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 더욱이 이 책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라 블런디- 교수형에 처해졌다가 살아나는데, 그녀 역시 영아살해죄로 사형 집행을 당했으나 사망 선고 뒤 살아난 앤 그린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의 실종에 이르면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결국 자신의 처지에 따라 진실과 거짓말을 섞어가던 화자들의 목적이 성공한 것이다. 각서를 둘러싼 검사와 피고인의 공방처럼, 결국 실제 있었던 일은 추측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거짓말은 범죄에 정당한 대응을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신이 아닌 이상 과거에 벌어진 일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직접 겪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재판을 하는 판사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심판의 대상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정한 처분을 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때때로 거짓말은 모든 죄 중에서 가장 나쁜 잘못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다른 것은 다 괜찮지만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훈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벚나무를 베고도 정직하게 잘못을 인정해서 용서를 받았다는 조지 워싱턴의 얘기가 대표적인 예다.

피고인의 유죄 여부에 집중해야

하지만 정말 거짓말이 가장 나쁜 잘못일까.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행동이다.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하고 뻔뻔하게 떠벌리는 사람이 훨씬 더 나쁘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원인이다. 거짓말은 단지 그 원인을 아는 것을 어렵게 할 뿐이다. 검사가 진짜 피고인에게 각서를 써주었을까 하는 것은 흥미의 대상일 뿐, 직시해야 하는 것은 실제 그 피고인이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다.




변호사

*‘금태섭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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