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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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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삶을 범죄로 만든 전쟁

미국과 멕시코 갱단의 마약전쟁을 그린 소설 돈 윈슬로의
<개의 힘> 죽고 죽이는 잔혹하고 무의미한 전쟁 속에서 모두 공범이 된 사람들
등록 2012-06-01 11:00 수정 2020-05-03 04:26

‘전쟁범죄’라는 말이 있다. 전시에 독가스 등 금지된 무기를 사용하거나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전쟁 중 적군에 붙잡히면 포로가 될 뿐이지만 전쟁범죄를 저지르다 잡히면 단순한 포로가 아닌 범죄자로서 처벌받는다. 그럴듯해 보이는 개념이지만, 이것은 마치 전쟁 자체는 범죄가 아니고 정당한 행위인데 그중 비열한(!) 행동만 처벌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성공한 마약왕 체포작전, 그러나…
흔히 9·11 테러 사건 이후 전쟁의 형태가 달라졌다고들 한다. 그 이전에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적이 누군지 분명했는데, 그날 이후에는 전쟁의 주체와 방식, 그리고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가 불분명해졌다는 것이다. 9·11 사건을 일으킨 알카에다는 국가도 아니고 영토를 가진 것도 아니며 세계 곳곳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확실히 기존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9·11 이전에도 그런 형태의 전쟁은 있었다. 그중 하나가 3200km에 이르는 미국-멕시코 국경, 그리고 걸프만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마약전쟁이다. 국가권력도 어쩌지 못하는 남미의 마약조직들은 막대한 이권을 놓고 미국 혹은 다른 조직과 사투를 벌인다. 조직원들은 군대 못지않은 무장을 갖추고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를 벌인다. 지휘부는 적과 때론 충돌하고 때론 협상하며 자기들에게 충성하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배신자를 응징한다. 말 그대로 전쟁이다. 그리고 이 전쟁도 다른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범죄다. 돈 윈슬로의 은 이 마약전쟁에 관한 소설이다.

돈 윈슬로의 소설 <개의 힘> 표지.

돈 윈슬로의 소설 <개의 힘> 표지.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인 주인공 아트 켈러는 백인 아버지와 멕시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빌어먹을 개망나니 같은 전쟁”인 베트남전에서 베트콩 하부조직원들을 암살하는 피닉스 작전에 참여했던 그는, 전쟁이 끝나자 막 신설된 기관인 마약단속국(DEA)으로 전출하라는 제안을 받고 승낙한다. 가난하게 자란 아트는 마약이 이웃들을 어떻게 망쳐놓는지를 보며 컸다. 마약전쟁은 베트남전과 달리 정의의 전쟁으로 보였다. 전출 결정 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마 싸울 가치가 있는 전쟁일 거야.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인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전쟁이란 없다. 진정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도 마찬가지로 없다.

시작은 좋아 보였다. 1975년 아트는 멕시코 시날로아주에서 양귀비밭을 초토화하고 ‘엘 파트론’(보스)으로 불리는 마약왕 돈 페드로 아빌레스를 체포하는 작전에 참가한다. 하늘에선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고엽제를 살포하고 아편 재배자들은 AK47 소총으로 응사를 해댔다. 모든 항공기는 멕시코산(産)이었지만 미국 마약단속국이 사들인 것이었고 마약단속국과 계약한 조종사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었다.

아빌레스는 미국 서부의 마피아와 손잡고 대량의 마약을 미국으로 밀반입하고 있었다. 아트는 시날로아 주지사의 특별보좌관인 티오 바레라와 그가 지휘하는 멕시코 특수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마약 재배지를 불태우고 아빌레스를 잡는 데 성공한다. 모든 일이 그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지만, 한 가지 의외의 사태가 일어난다. 특수요원들에게 포위돼 두 손을 올린 채 차에서 내리는 아빌레스에게 티오의 부하들이 무자비한 총격을 가한 것이다. 티오는 직접 아빌레스의 뒤통수를 겨냥해서 확인 사살을 한다. 아트로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지만 티오는 미국의 힘을 빌려 아빌레스를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티오가 새로운 엘 파트론이 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마약조직과 공생

남미의 마약조직은 정부를 우습게 알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마약조직의 돈을 받는 부정한 경찰관의 이름을 폭로한 경찰관은 몸의 모든 뼈가 부서진 채 살해당한다. 티오의 뒤를 쫓던 검사는 조깅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심지어 수감돼 있던 조직원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교도소장이 살해당하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예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없다.

또한 마약조직은 사람들을 먹여살린다. 그들은 농부들이 재배한 아편을 매입해 수출하며 파산 지경에 이른 멕시코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매입해주기도 한다. 마약왕들은 지역 공동체 센터와 학교, 병원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다. 밀고자는 입에 총을 맞아 살해당하고 배신자는 산 채로 얼굴 가죽이 벗겨진 채 뒤통수에 총을 맞게 되지만, 운명에 순응하는 사람은 마약조직과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마약조직의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범죄가 되는 것이다. 옆집에 살던 한 가족이 배신자라는 이유로 몰살당해도 못 본 척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약조직과 전쟁을 벌이는 미국이라고 선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미국은 마약의 소비자라는 원죄를 가지고 있다. 모든 범죄의 원인과 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겉으로는 마약조직과 전쟁을 치르면서 뒤로는 손을 잡고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하지 못하도록 독재자들에게 무기를 판매한다. 마약조직에 대한 수사도 적법 절차와는 거리가 멀다. 아트는 자신의 동료 수사관을 살해한 마약조직의 보스를 체포하려고 그의 가족을 협박하고 조직원들을 고문한다. 미국이 고용한 헬기 조종사는 마약조직원을 두 명씩 태우고 올라가서 한 명을 공중에서 던진다. 그 모습을 보면 남은 한 명이 보스가 숨어 있는 곳을 실토하기 때문이다.

이 지옥 같은 광경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마약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벌이는 미국일까. 남미 사회에서 최고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마약조직의 보스가 되려고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범죄자’들일까. 혹은 이 모든 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일까. 그러나 책임을 따지기가 무의미할 정도로 이미 모든 사람은 공범이 돼버렸다.

은 소설이지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책에는 미국 수사관들이 멕시코의 의사를 납치해서 미국으로 데려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 의사는 마약조직이 미국 수사관을 고문하는 일을 도운 혐의를 받았다. 고문당하는 수사관이 정신을 잃어 고통을 못 느끼거나 일찍 죽지 않도록 생명을 연장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미국 마약단속국 직원들이 멕시코에서 그 의사를 체포했다. 의사가 고문을 돕는 사회, 그것이 마약전쟁이 만들어낸 모습이다(실제 사건에서 미국 법정에 선 이 의사는 마약단속국이 자신을 멕시코 국내에서 체포한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전쟁에 무슨 ‘의지’가 작동하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에서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벌어지는 전쟁의 모습을 보면 거기에 무슨 ‘의지’가 작용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의 삶 자체를 범죄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전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약전쟁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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