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유학 시절, 모처럼 한인들과 어울려 한국어로 얘기를 나눌라치면 ‘우리’말은 종종 귀 설었다. 이국의 거리에서 멋쩍게 떠다니던 한글의 자모(字母)는 우선 백인들과 흑인들, 그리고 그들의 알파벳 사이에서 왜소하게 소외되었다. 그러곤, 중국도 일본도 아닌 나라에서 온 우리의 무춤해진 자의식에 의해 잼처 소외되곤 했다. 마치 거듭해서 왼 낱말이 언어적 긴장을 잃어 어느새 한갓 ‘소리’로 떠다니게 되듯, 유학하던 우리는 이미 우리말을 어려워·두려워하고 있었다. 영어가 익숙해지면서 그 말은 나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지만, 한국어는 그런 식으로 나를 조금씩 떠나고 있었다.
그간 수많은 영화를 보았고, 영화와 관련한 책도 상재했으며, 영화·영상 관련 강의도 했지만, 특히 백인과 아시아인을 섞어 만든 영화는 내 눈엔 대체로 꼴불견이었다. 그것은 영화적 기술과 재능의 부재가 아니라 어떤 (넓은 뜻의) 생활세계적·미학적 부조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인이 결국 ‘내지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유대인의 운신과 태도가 아무래도 다르고, 미국의 흑인들이 흑인의 미국을 만들 수는 없고, 심지어 지방색이나 학벌마저도 같은 민족과 사회의 구성원들을 분열·이간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임권택 영화 속의 한복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고,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속의 기모노도 곱지만, 이들을 섞는 순간 역사적 상처에서부터 개인 취향적 부조화에 이르기까지 그 섞임의 초기 비용은 한껏 도드라진다.
이같은 부조화와 분열, 소외와 불화의 앞자리에 여러 나라말이 섞이고 갈라진다. 나로서는 첫 외국 나들이였던 유학길에서 느낀 영어와 우리말 사이의 어긋남과 소외는 다민족 사회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강화된 현실(Augmented Reality) 속에서 선진화와 세계화라는 구호에 얹힌 채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내가 ‘서울 사람’을 처음 만나 서울말을 귀 설게 듣던 게 그리 오래전도 아닌데, 이젠 우리 땅에서도 수십 종의 언어가 혼종하고 경합한다. 도심 곳곳에서, 특히 지하철에서 (베트남어도 옌볜말도 아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백인 젊은이들이 내가 미국에서 노상 접하던 그 편한 복장으로 왁달박달하게 제 나라말로 떠드는 것을 볼 때마다 내 유학 시절의 소외를 가만히 떠올리게 된다.
한국은 이미 단일민족 사회를 벗어나고 있다. 그사이, 이른바 사회적 방외자나 가욋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톨레랑스’의 문화도 충분치 못한 터에, 거꾸로 한복은 호텔에서 거절당하고 국가는 영어 식민화도 모자라 ‘영어능력평가 시험’(NEAT)이라는 것을 국정(國定)한다. 다 아는 대로 뉴트리나 큰입배스, 황소개구리 등은 우리 안의 필요에 의해 밖에서 들여왔지만 토착의 생태에 어울리지 못하면서 공적(公敵)으로 내몰려 도살당하고 있는 외래종 생물들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가물치는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곳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몰려 역시 주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로 다르되 잘 어울리기’(和而不同)는 의도나 의욕처럼 쉽지 않다. 굳이 한복과 기모노를, 백인과 황인을, 큰입배스와 붕어를 섞을 수밖에 없었고, 그 후과가 돌이킬 수 없다면, 이미 톨레랑스의 지혜만이 관건이 아니다. 인류사에 검질기게 따라붙은 배제와 학살은 그 현실의 단면들이다. 어울리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며, 잘 어울리지 않고는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온다. 어울려 살기! 이후, 죽기 살기로 절실한 과제가 될 것이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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