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왜 까냐고 묻는 아이들

등록 2011-01-14 14:41 수정 2020-05-03 04:26

사법연수원생들이 연수차 파리에 들렀을 때, 통역을 해주면서, 프랑스 사람들이 종종 그들을 단체로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으로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옷을 (거의) 똑같이 입었기 때문이다. 연수원생들은 그들을 10년쯤 젊게 봐주는 프랑스 사람들의 어설픈 눈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던 모양이나, 좋아하기만 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나이의 점잖은 한국 남자들이 점잖은 자리에 가는 복장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튀지 않는, 품위를 지키는 옷차림 속에 안전히 자신을 가두다 보니, 그들의 복장은 거의 유니폼에 가까워졌던 것. 이른바 한국 사회 최고의 엘리트집단으로 자부할 그들, 바로 판사·검사·변호사가 되어 사회의 중요한 축을 이룰 그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과연 얼마나,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누려왔을지 생각해보면, 자유로운 복장임에도 교복 속의 고딩들로 보일 수 있었던 건 슬프고도 당연한 귀결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보수 질서 흔드는 교육혁명

이른바 ‘포항 형제파’의 기도 안찬 독재를 관통하는, 이 견적도 안 나오는 한심한 권력집단에 기가 질려 저항을 꿈꾸기조차 아찔한 이 시절, 우리가 이뤄놓은 선거혁명은 교육이라는 가장 민감한 지점에서 제도의 힘을 빌려 거대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무상급식에 이은 교복과 두발 자율화, 그리고 학생인권조례가 그것이다. 우파들은 언론을 동원해 대대적인 저항에 나선다. 권위와 위계질서와 훈육, 주입식 교육에 기대어 지탱돼온 사회의 근본적 지배 방식을 뿌리부터 흔드는 일이므로, 그들의 반발은 히스테리에 가깝다. 단발령을 기점으로 한국은 근대사회로 접어든다. 두발의 자유는 정신의 자유, 복장의 자유는 독립된 자아의 성장이 시작됨을 상징한다. 아이는 네 살만 되어도, 엄마가 입혀주는 옷보다 자신이 선택한 옷을 입기 원한다. 일상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자유를 6년 동안 차단함으로써, 학교는 아이들의 자유와 자아가 성장하는 것을 차단하며, 그것으로 ‘까라면 까는’ 전 사회의 군대화를 위한 기초 준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훈련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후 자유를 손에 쥐어줘도 자유의 사용설명서를 상세히 ‘주입식’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한,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가소롭게도, 교복 자율화를 반대한 자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논리는, 그리하면 아이들 사이의 빈부격차가 더 도드라진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교복은 학교 내에서 빈부격차가 완화되는 데 기여했는가. 교복업체들끼리의 담합, 교장과의 은밀한 거래,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터무니없는 교복 가격의 폐해로 교복은 학교를 둘러싼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해왔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만큼의 빈부차가 사회에 존재하고, 그 아픔을 헤아린다면, 그것이 실질적으로 완화되도록 기본적 부분에서 복지를 행하는 것이 순서다. 빈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교육받고 굶지 않을 수 있다면, 가난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아이들의 권리를 시장 논리에 던져두려 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 복장을 균일화하려 한다는 주장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이보다는 복장 자율화가 교사의 권위를 상실시킨다는 주장이 훨씬 솔직하다. 하지만 오로지 금지할 권한, 매를 들 수 있는 권한으로 지켜지는 권위였다면, 이제 그것을 내려놓고 학생들을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아야 할 때다.

유니폼은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자아가 옷 밖으로 넘쳐나올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공공연한 표시다. 한겨울에 교실 창문을 열고 웃통을 벗으라면 벗고, 별 잘못도 없는데 단체로 교사가 뺨을 때리면 뺨을 맞고 오는 아이들은, 군대에 가서 고참의 고문에 묵묵히 시달리고, 방송사 사장이 되어서도 권력자가 ‘조인트’를 까면 까이는 사람이 된다.

 

“모든 어른들은 종이호랑이”

1968년 덴마크에서 출간돼 13개국에서 번역된 청소년 해방지침서 (Red Book)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어른들은 종이호랑이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면, 교육은 같은 높이에 서서 서로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제 어른들은 사실 “우린 종이호랑이일 뿐”이었음을 고백하고, “까라면 왜 까는지 묻는” 맹랑한 우리의 아이들을 키워내야 한다. 권위에 기대어 지탱되는 이 알량한 세상을 처분하고, 자유로운 지성이 남실대는 세상에서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다면.

목수정 작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