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 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의를 읽노라면, 그저 단순한 정의일 뿐인데도 뜨끔하게 와닿는 대목이 있다. ‘신체의 기능·구조상 결함’이나 ‘물리적 행동에 제약을 받는 상태’를 장애로 규정하는 건 익숙하지만, ‘사회참여에 제약을 받는 상황’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낯설다. 이건 무슨 뜻일까? ‘일상생활을 향유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를 뜻한다고 한다. 누군가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지 여부는 오롯이 그 자신에게만 원인을 돌릴 수 없는 일이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에게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조건을 얼마나 잘 마련해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WHO의 정의는 “장애란 개개인의 신체 특성과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특성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름대로 해석해보면, 장애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애인, 그러니까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든가 감각기관이 남들보다 덜 민감하다든가 한 사람들도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을 만큼 각종 인프라가 갖춰지고 타인의 편견이 사그라든다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어떤 이들은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든가 감각기관이 남들보다 덜 민감한 것을 ‘장애’로 낙인찍지 말고 그냥 ‘차이’로 부르자고 주장한다.
결국 장애-비장애를 구별짓는 ‘선’이 있다기보다는 아주 흐릿하거나 폭이 매우 넓은 모호한 ‘면’이 존재할 뿐이란 생각에 이른다. ‘일상생활을 향유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라는 장애의 정의로 돌아가면, 사실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비장애인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진다. 휠체어를 사용해야 이동이 가능한 A는 늘 쾌활한 대화를 주도할 줄 알고 만나는 사람마다 호감을 갖게 한다. 코끼리만큼 튼튼한 다리를 가진 B는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르고 그래서 자주 타인과 다툼을 벌인다. 누가 일상생활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인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도 WHO의 정의상 장애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쉽게 친밀해지지 못하고, 자주 신경질적인 감정 표출을 하며, 힘겨운 상황을 도피하려는 성향도 보이며, 최근 들어서는 시력이 매우 떨어지고 있다. 장애와 비장애는 내 안에 매우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라는 말보다 ‘차이’라는 말에 더 공감하게 된다면, 서로 그 차이를 존중하거나 줄여나가는 노력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친구로 맞이하고,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을 위해 세금을 더 내고, 나이가 어린 사람을 측은지심으로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상, 이번호 표지이야기에서 장애인의 성적 권리 문제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생각의 워밍업이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이명박 대통령이 한가위 전날의 폭우로 수해를 입은 지역에 찾아가 어떤 말실수를 했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말실수라기보다는 공감하는 능력의 결여가 아닐까 한다. 병역기피 의혹에 당당하게 대처하는 고위 공직 후보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일상생활을 향유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경우’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한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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