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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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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없는 세상, 정의 없는 세상

등록 2010-08-17 16:17 수정 2020-05-03 04:26

1.
얼마 전 출근길 버스 안에서 목격한 일이다. 나란히 위치한 일인용 좌석의 앞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뒤에는 남성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고, 한동안 통화가 이어졌다. 노인은 목소리가 좀 큰 편이어서, 대개 조용한 아침 시간 버스에서는 다른 승객들의 신경을 다소 불편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은 아니었다. 통화 내용으로 미뤄 그에겐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이 뒤를 흘낏 돌아봤다. ‘좀 조용히 통화하시지…’라는 무언의 눈빛이 노인에게 다소 불편하게 가닿았을 것이다. 통화가 끝나고 얼마 뒤 이번엔 여성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그는 일상적인 톤으로 친구인 듯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눴다. 그때 갑자기 노인이 고함을 질렀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인용부호 안에 넣을 정확한 표현은 기억하기 힘들지만, 대략적인 취지는 ‘내가 전화 통화할 때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째려보더니 너는 왜 통화를 하느냐.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면 너도 전화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냐. 너처럼 전화가 오면 받을 수밖에 없는데, 왜 내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노인은 존댓말을 쓰지 않았고 “싸가지” “×년” 같은 단어가 몇 번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성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 통화를 하며 상대방에게 “누가 자꾸 시비를 걸어”라고 평범한 톤으로 말했다. 주위 승객들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스에서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결례가 원인이 되는 시비가 종종 목격된다. 그럴 때는 잘못한 쪽에 은근히 심판의 눈길을 보내거나 조금 용기를 내어 잘못 없는 쪽을 거들면 된다. 그런데 그날 그 해프닝에서는 그러기가 머뭇거려졌다. 처음 드는 감으로는 노인을 탓하고 싶었다. 거친 표현 때문이었다. 하지만 맨 처음 둘 사이의 긴장을 유발한 것은 여성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노인은 불쾌감을 유발할 정도의 큰 목소리로 통화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통화하는데 누군가 역력한 비난의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면 기분이 분명 나쁠 것이다. 더구나 그 직후 여성은 노인과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 그러다, 노인이 어른 입장에서 좋은 말로 타일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여성이 어른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 실례했다는 인사치레라도 하고 마무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 여성은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습관처럼 누가 버스 안에서 이렇게 통화를 하는지 돌아본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또 노인은 그런 평범한 돌아봄에 모독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날 출근길은 아주 짧게 느껴졌다. 누가 옳고 누가 그릇됐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일도 그런 것 같다. 문제는 늘 회색빛 경계에서 발생한다. 누가 봐도 분명하게 흑백이 드러나는 경우라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2.
지금 정의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현상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흑백이 분명하되 흑백이 전도된 현실에 대한 불만이 그 바탕에 자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인복 대법관 후보자의 위장전입 사실이 드러났다. 정의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분이 아파트를 분양받으려 법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도 법질서를 강조하는 집권 여당은 인준에 찬성하고 있다.
그렇게 인준이 이뤄지면, 그는 법정으로 달려가는 온갖 정의의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흐릿한 회색 바다에서 한 톨의 정의를 건져올리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흑백이 전도되고 하늘과 바다가 뒤바뀐 뒤인데, 누가 그 회색의 정의를 신뢰한단 말인가.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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