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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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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카퍼레이드 하겠네

등록 2010-03-23 18:31 수정 2020-05-03 04:26

겨울올림픽의 열기가 점차 무르익을 즈음 친구와 내기를 했다. 이번 겨울올림픽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국민적 환호로 볼 때 선수들이 귀국하면 카퍼레이드가 있고도 남겠다는 친구의 농담이 시작이었다. 1980년대도 아니고 카퍼레이드라니. 친구의 말에 나는 핀잔으로 퉁을 치며 맞섰다. 구시대적 생각일 뿐 아니라, 요즘 너도나도 시대가 거꾸로 간다고들 하는 일종의 피해의식이나 강박에서 오는 과도한 상상이라고 말이다.

이러다 카퍼레이드 하겠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러다 카퍼레이드 하겠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청와대 오찬의 회장님

여러모로 어려운 때 국민의 단합과 희망을 일깨운 공으로 보나, 각하와 주무 부처 유인촌 장관의 그간 행태로 보나 충분히 유추 가능한 이벤트라며 친구는 내기에 여유를 보였다. 막바지로 갈수록 올림픽은 흥행 가도를 달렸고 처음 보는 스포츠 종목과 생소한 스포츠 용어가 넘쳐났다. 한정된 겨울 스포츠라는 과거의 인식이 무색하게 다양한 부문에서 좋은 성적과 기록도 쏟아졌다. 사회적으로 왁자지껄한 여러 쟁점은 뒤로 묻혔다. 하지만 서울 광화문에서 종로 일대로 이어지는 서울 시내 카퍼레이드는 한 차례 재미난 상상에 그쳤고 친구가 사는 점심을 먹는 것으로 내기도 끝이 났다.

그런데 청와대에 초대된 선수들과 대통령의 오찬에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동석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이유로 한 사면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의 행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리한 사면을 단행한 사람과 사면 당사자의 지나치게 빠른 공식 합석을 보는 것은 참 씁쓸했다. 올림픽은 몰염치도 묻어버린다. 얼마 전 회장님은 국민의 ‘정직’을 거론한 바 있다.

아마도 그분의 정직은 법적으로 도의적으로 깨끗한 기업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우리의 관대함을 먹고 거대하게 자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뭐가 나아도 낫지 않겠느냐는 국내 최대 기업에 대한 막연하지만 무한한 국민적 신뢰 역시 그 정직을 키우기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신속하고 친절한 AS와 세련되고 깔끔한 디자인의 유혹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 개개인의 소소한 이기와 선택이 그 정직에 일조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TV에서 금메달의 주역들과 오찬 테이블에 앉은 각하와 회장님을 보고 있는데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이 스쳤다. ‘정의 사회 구현’이나 ‘보통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아는 뜻으로 제대로 쓰이지 못했던 그 말들의 잔상이 회장님의 ‘정직’에 얹혀 있었다. 친구의 농을 핀잔할 때처럼 과거에 대한 피해의식이니 강박이니 하며 가볍게 넘기기에는 너무 찜찜하고 언짢은 기억이었다.

젊은 선수들의 패기와 발랄한 세리머니가 새롭고 신선했던 2010년 겨울올림픽에서 촌스러운 유물로 잊고 있던 카퍼레이드를 떠올리는 일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하다. 김연아 선수의 아름다운 연기를 회장님의 ‘정직’과 제대로 쓰이지 못했던 말들의 시대와 함께 떠올려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삐져나오고 들추어지는 과거 시대의 기억들은 불편하고 고단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에서 툭툭 불거질 때는 더욱 그렇다.

정의 사회 구현, 보통 사람, 정직

삼성 불매가 국익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로 인한 삼성의 해외 신인도 실추가 주는 경제적 손실을 걱정하며 불매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 말고 회장님의 정직이 불편한 사람, 그 정직이 자신이 아는 정직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 불쾌하다는 사람, 그들은 정작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 부자연스럽고 유쾌하지 못한 기억 속에서 내내 그 선택이 궁금하다.

신수원 ‘손바닥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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