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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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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박쥐만큼만

등록 2010-01-21 11:56 수정 2020-05-03 04:25

새해를 맞아 무더기로 쌓여 있는 영수증과 고지서들을 정리했다. 그중에는 뜯지도 않고 고이 모셔둔 것도 있었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의 후원금 지로용지였다. 한동안 잊고 있던 터라 보자마자 뜨끔했다. 내가 그 단체에 얼마 안 되기는 하나 후원금을 정기적으로 보냈던 시기는 임신 기간 중이었다. 태교와 선행의 상관관계를 고려한 그야말로 얄팍하기 그지없는 기부 행위였다. 그런데 나의 기부문화를 ‘커밍아웃’하자면 대체로 그러했다고 할 수 있다. 감정적이고 들쑥날쑥했다. 어려운 이웃을 다룬 방송을 보다가 연속극 보듯 눈물을 흘리며 충동적으로 입금을 한 뒤 뿌듯해하는 수준이었다. 나의 이런 가식이 못마땅해 가뭄에 콩 나듯 성금을 낼 때마다 그저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한마디로 나는 촌스럽게도 ‘기부’와 친하지 않은 ‘기부 기피자’였다.

나를 위해 남을 돕는다

흡혈박쥐만큼만.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흡혈박쥐만큼만.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어차피 나라님도 구제 못하고 심지어 마더 테레사도 깊은 회의에 빠지게 한 전 지구적 가난을 내 돈 몇 푼으로 어떻게 해결하겠느냐며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만은 아니었다. 물론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김밥 할머니가 나올 때마다 왜 복지국가에 못 태어난 죄로 할머니들이 이 고생을 하셔야 하는지 구멍 많은 정책을 탓하는 마음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기부’라는 행위 자체에 늘 일정한 거리감을 갖고 있는 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기부계의 된장녀’ 냄새를 풍기며 나는 공정무역 원두와 폴 뉴먼의 뉴먼스오운 포도주스는 기꺼이 사면서도 복지단체의 자동 계좌이체에는 인색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나눔’도 나눠본 사람이 더 잘 나누기 마련이었다.

무언가를 함께하고 공동선을 실천할 때마다 나를 머뭇거리게 했던 질문, ‘이거 결국 남이 아니라 나 만족하자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무조건 삐딱하게 볼 게 아니었다. 나를 위해 남을 돕는다, 이 말이 사실인즉 연구 결과를 보면 같은 노인들끼리도 자원봉사를 한 노인의 삶의 만족도가 그렇지 않은 쪽보다 더 높을 뿐 아니라, 이것이 건강과 수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해관계 없는 타인을 도움으로써 결국 그 이익이 자신한테 돌아온다는 것인데, ‘행복’과 ‘만족도’를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꽤 알찬 듯하다. 주변을 보면 간혹 ‘기부’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다. 뭐 원래 여유가 있으니까 남한테도 눈길이 가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나 자신에게 한 달에 스타벅스 톨 사이즈 한 잔 값도 기부하지 않는 생활이 과연 글로벌 시티즌으로서 모양새 나는 일이냐고, 그래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지요’다.

예전에 나눔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혼자 낄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중남미 흡혈박쥐들은 이틀인가를 사냥에 실패하면 생명에 지장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듯 모든 박쥐도 다 사냥에 성공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한번 피를 빨 기회를 잡은 박쥐들은 필요 이상으로 섭취를 하고 이 피를 쫄쫄 굶고 있는 동료 ‘루저’ 박쥐들에게 토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박쥐들은 이 자선을 베푼 박쥐를 자기들 사회에서 정확히 기억해준단다. 아, 누가 이런 괜찮은 애들을 두고 ‘박쥐 같은 놈’이라 욕한 것인지. 그 글을 읽으면서 공동체 의식 부문에서는 박쥐가 나보다 한결 낫다는 생각에 웃었다.

중독자의 증언을 한번 믿어볼까

박쥐보다 못한 내가 새해를 맞아 뭐 대단한 선행을 베풀 자신은 없다. 그래도 타인은 물론 심지어 나의 행복까지 보장한다는 기부중독자들의 증언을 한번 믿어볼 생각이다. 내가 어쩌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어떤 간절한 에너지가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전달되는 시대이니까.

이지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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