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무더기로 쌓여 있는 영수증과 고지서들을 정리했다. 그중에는 뜯지도 않고 고이 모셔둔 것도 있었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의 후원금 지로용지였다. 한동안 잊고 있던 터라 보자마자 뜨끔했다. 내가 그 단체에 얼마 안 되기는 하나 후원금을 정기적으로 보냈던 시기는 임신 기간 중이었다. 태교와 선행의 상관관계를 고려한 그야말로 얄팍하기 그지없는 기부 행위였다. 그런데 나의 기부문화를 ‘커밍아웃’하자면 대체로 그러했다고 할 수 있다. 감정적이고 들쑥날쑥했다. 어려운 이웃을 다룬 방송을 보다가 연속극 보듯 눈물을 흘리며 충동적으로 입금을 한 뒤 뿌듯해하는 수준이었다. 나의 이런 가식이 못마땅해 가뭄에 콩 나듯 성금을 낼 때마다 그저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한마디로 나는 촌스럽게도 ‘기부’와 친하지 않은 ‘기부 기피자’였다.
나를 위해 남을 돕는다
흡혈박쥐만큼만.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어차피 나라님도 구제 못하고 심지어 마더 테레사도 깊은 회의에 빠지게 한 전 지구적 가난을 내 돈 몇 푼으로 어떻게 해결하겠느냐며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만은 아니었다. 물론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김밥 할머니가 나올 때마다 왜 복지국가에 못 태어난 죄로 할머니들이 이 고생을 하셔야 하는지 구멍 많은 정책을 탓하는 마음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기부’라는 행위 자체에 늘 일정한 거리감을 갖고 있는 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기부계의 된장녀’ 냄새를 풍기며 나는 공정무역 원두와 폴 뉴먼의 뉴먼스오운 포도주스는 기꺼이 사면서도 복지단체의 자동 계좌이체에는 인색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나눔’도 나눠본 사람이 더 잘 나누기 마련이었다.
무언가를 함께하고 공동선을 실천할 때마다 나를 머뭇거리게 했던 질문, ‘이거 결국 남이 아니라 나 만족하자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무조건 삐딱하게 볼 게 아니었다. 나를 위해 남을 돕는다, 이 말이 사실인즉 연구 결과를 보면 같은 노인들끼리도 자원봉사를 한 노인의 삶의 만족도가 그렇지 않은 쪽보다 더 높을 뿐 아니라, 이것이 건강과 수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해관계 없는 타인을 도움으로써 결국 그 이익이 자신한테 돌아온다는 것인데, ‘행복’과 ‘만족도’를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꽤 알찬 듯하다. 주변을 보면 간혹 ‘기부’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다. 뭐 원래 여유가 있으니까 남한테도 눈길이 가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나 자신에게 한 달에 스타벅스 톨 사이즈 한 잔 값도 기부하지 않는 생활이 과연 글로벌 시티즌으로서 모양새 나는 일이냐고, 그래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지요’다.
예전에 나눔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혼자 낄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중남미 흡혈박쥐들은 이틀인가를 사냥에 실패하면 생명에 지장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듯 모든 박쥐도 다 사냥에 성공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한번 피를 빨 기회를 잡은 박쥐들은 필요 이상으로 섭취를 하고 이 피를 쫄쫄 굶고 있는 동료 ‘루저’ 박쥐들에게 토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박쥐들은 이 자선을 베푼 박쥐를 자기들 사회에서 정확히 기억해준단다. 아, 누가 이런 괜찮은 애들을 두고 ‘박쥐 같은 놈’이라 욕한 것인지. 그 글을 읽으면서 공동체 의식 부문에서는 박쥐가 나보다 한결 낫다는 생각에 웃었다.
박쥐보다 못한 내가 새해를 맞아 뭐 대단한 선행을 베풀 자신은 없다. 그래도 타인은 물론 심지어 나의 행복까지 보장한다는 기부중독자들의 증언을 한번 믿어볼 생각이다. 내가 어쩌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어떤 간절한 에너지가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전달되는 시대이니까.
이지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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