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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서 더 이상 노래가 나오지 않아”

데뷔 30주년에 마지막 정규공연 여는 정태춘·박은옥 부부…
“수년간 싸운 대중의 열매를 누가 가져갔나”

제783호
등록 : 2009-10-29 10:46 수정 : 2009-10-2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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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청춘을 빚진 자가 한둘이랴. 그들의 노래 없이 청춘을 회고하는 자가 누군들 있으랴. 물경 30년에 걸친 영혼의 빚을 아주 감출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의 노래 덕분에 나의 오늘이 새삼스런 바 있으므로, 아무리 다독여도 떨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특별한 상차림을 혼자 받는 마음으로, 지난 10월12일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의 노래를 들었다. 남자는 흰머리가 늘었고, 여자는 볼살이 조금 붙었다. 부부는 10월27일부터 11월1일까지 서울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정태춘·박은옥 데뷔 30주년 공연’을 연다. 연습을 마친 정씨는 담배부터 피워물었다. 박씨는 일회용 커피를 내왔다. 지난 30년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 시절이 벅차다.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을 앞둔 정태춘·박은옥씨가 지난 10월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 담배까지 피우는데 목소리가 여전하다.

정태춘(이하 정) = 나이가 들면 가수는 소리가 더 좋아진다. 그리고 이 담배는…, 담배 중에 풍미가 제일 좋다(그는 타르 6mg, 니코틴 0.6mg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피웠는데 요즘도 한 갑 반 정도 피운다.

박은옥(이하 박) = 에이, 두 갑 이상은 피울 거다. 그런데 이이는 1집 때보다 지금 목소리가 훨씬 더 깊어졌다.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다. <탁발승의 새벽 노래> 같은 걸 들으면 30년이 지났어도 너무 대단하다. 그런 사람이 왜 노래를 안 만드는지 안타깝다(그 이유는 이 기사의 말미에 나온다).

- 왜 그렇게 남편을 존경하나? 평등부부는 아닐 것 같다.

정 = (웃으며) 잘못 알려져 있다. 이 사람이 자꾸 괜한 소리를 하는 거다. (두 사람 관계에서) 박은옥씨의 재량권이 많다.

박 = 아내로서는 이해하고, 팬으로서는 좋아하고…. (웃음)


바이올린 전공으로 음대를 지망했던 정태춘은 재수 시절 청춘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밀양, 목포, 울릉도, 제주도 등으로 가출했다. 형에게 붙잡혀 경기 평택의 고향집에 끌려와 농사일을 하다 군대에 갔고, 군복무 중에 노래를 지었다. 경남 마산에서 자란 박은옥은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화장실에서도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박씨는 회고한다. 가수 최백호의 권유와 추천으로 레코드 회사를 찾았고, 마침 데뷔 앨범 녹음을 마친 정태춘을 만났다. 정태춘은 박은옥에게 자신의 곡을 선뜻 내주었다. 정씨는 1978년, 박씨는 1979년 데뷔했다. 두 사람은 1980년 5월 결혼했다.

- 데뷔 직후 스타가 됐다. 왜 그 길을 계속 가지 않았나.

정 = 처음엔 상도 받고 각광을 받았지만(그는 1978년 문화방송 10대 가수가요제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그 세계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밖에서 빙빙 돌았다.

박 = 우리 둘 다 연예계에 맞지 않았다(다른 자리에서 부부는 “<명랑운동회> 같은 오락 프로에 출연하는 게 싫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 그럼 왜 하필 대중가요를 선택했나.

정 = 음대를 지원했다 낙방하면서 재수를 했다. 그러다가 이쪽(대중음악)으로 넘어왔다. 클래식은 연주만 하는데, 나는 사람들한테 내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노래를 택했다.

- 직접 작사와 작곡을 했는데, 노래는 어떻게 만들었나.

정 = 원래 노래 만드는 사람은 그게 아무 때고 나온다. <일어나라 열사여>를 집회 현장에서 쓴 게 아니다. 운전하면서 만들었다. <탁발승의 새벽 노래>도 절에 가서 만든 게 아니다. 뙤약볕 내리쬐는 여름, 서울 인사동 옥탑방에서 웃통 벗어부치고 만들었다. <북한강에서>는 예비군 동원훈련 받으러 가면서 악상을 떠올렸다.

쇼 프로에 끌려다니는 게 싫었던 정태춘·박은옥은 다른 길을 택했다. 1985년부터 3년 동안 전국의 소극장과 야외무대를 순회하며 공연했다. 1989년에는 갓 출범한 전교조를 지지하는 전국 순회공연을 다시 열었다. 대학 노천극장이 그들의 무대가 됐고, 노동자·농민·학생이 그들의 대중이 됐다.

- ‘초기 정태춘’에서 ‘후기 정태춘’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있었나.

공연 연습을 끝낸 부부가 스튜디오 앞 골목길을 정답게 거닐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정 = 나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지식인도 아니다. 그러나 <실천문학> 같은 것을 읽으면서 삶이나 예술의 목적을 찾았다. 내가 주류 문화를 왜 싫어하는지 알게 됐다. 그만큼 그런 문제에 갈급해 있었고,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박 = 초기 노래를 들어보면 세상과 상관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20대 청년의 고백 같은 게 있다. 이 사람한테는 결혼이 현실에 눈뜨게 하는 계기였던 것 같다. 발 딛고 사는 세상의 변화를 고민하게 된 것 같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일어나라 열사여>) “여기저기 썩은 웅덩이 쓸어버리며 넘쳐 가자.”(<황토강으로>) 1990년의 <아, 대한민국> 앨범은 그 절정이었다. 민주주의, 빈곤, 평화를 긴박하게 따져물었다. 부부는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심의도 거부했다. 불법 카세트테이프는 대학가와 집회 현장에서 팔려나갔다. 정부는 그를 고발했으나, 정태춘·박은옥은 위헌심판을 신청했고, 결국 1996년 음반 사전심의 폐지를 끌어냈다. 이후의 모든 한국 가수들은 부부에게 빚을 지고 있다.

- 2002년 10집 앨범 이후 새 노래가 없다. 2004년 공연 뒤로는 외부 활동도 하지 않았다.

정 = 나는 원래 말을 하는 가수였다. 지난 5년 동안 그 말문을 닫았다. 노래도 만들지 않았다. 드물게 작은 무대에 올라도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상품성이 강한 초기 노래만 불렀다.

박 = (초기 노래가 상품성이 강하다는 건) 당신 생각이지.

정 = 신문이나 방송도 보지 않았다. 시사 문제에 관심을 끊었다. 용산 참사 현장에도 가본 적 없다. 다만 얼마 전부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을 구독하고 있다.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세상을 주유하는 일이 즐겁다.

- 뭐가 그리 불편했나.

정 =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불편했던 사람들, 절망했던 사람들이 있다. 누가 승리했는가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대중이 몇 년 동안 싸운 열매를 누가 가져간 것인가. 그런 세상에 편입해 들어갈 수 없었다. 자본의 지배로 진입해가고 있었다. 거기에 동승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 문명의 일부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선언하고 이 문명에서 이탈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박 = 자기 입으로는 (세상에 대해) 문을 닫았다고 하지만, 더듬이는 항상 사람 사는 일에 가 있다.

정 = 아니, 역할론은 싫다. 어떤 것을 해왔으니까 이제는 이런 것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지금까지 첨병 역할을 했으니 앞으로도 전선에 서라고?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이란 건 없다. 자기 열정으로 자기 실천을 하는 것이지. 열정이 식으면 그 사람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상황에 대해 새로운 열정을 가진 인간이 반드시 나타난다.

1998년 내놓은 앨범 <정동진>에서 정태춘·박은옥은 다시 서정의 세계로 귀의하는 듯했으나, 실은 긴 침묵의 시작이었다. 2002년에 나온 앨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는 사실상의 은퇴 선언이었다. “여보세요, 새로운 세기가 어디요. 21세기로 가는 길이 어디요. 여길 나가는 길이 어디요. 동지여 나도 몰라요”(<오토바이 김씨>)라고 노래할 때, 그것은 정태춘의 진심이었다.

- 너무 결벽증적인 것 아닌가.

정 = 내 체질이 그렇다. 아웃사이더고 이상주의자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빠져나오는 형질을 타고났다. 대중가수였지만, 대중 옆에 있는 것보다는 자유롭고 이상주의적인 예술가이고자 했다. 한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할 수 있었지만, 평생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영역에서 빠져나와 자유롭게 사고하면서, 비현실적일지라도 원론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대중에게 너무 투정을 부리는 것 아닌가.

정 = 투정이 아니라 내 노래에 너무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중이 정태춘의 노래를 여전히 좋아한다고? 그건 나에 대한 호의의 표현이겠지만, 때로 그 호의가 지나치면 비난이 된다. 내 노래를 여전히 좋아하는데 왜 그만뒀느냐는 비난…. 나는 그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 덩달아 쉬게 되어 서운했겠다.

박=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이 사람이 다 접고 산에 들어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정반대였다. 육아 문제에서 벗어나 비로소 음악을 편안하게 열심히 해봤으면 할 때였다. 다만 함께한 것이 오래 되다 보니, 혼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입을 닫은 두 가수를 무대에 올려세운 것은 오랜 ‘팬’들이었다. 지난해 12월, 100여 명의 각계 인사들이 어느 식당을 빌려 데뷔 30주년을 축하해줬다. 의기를 모아 ‘기념사업단 추친위원회’까지 만들었다. 단병호, 도종환, 이철수, 이외수, 문성근, 윤도현, 김제동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번 공연은 그 결실이다.

- 이번 공연도 억지로 하는 것인가.

정 = 아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감사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다만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메시지나 스토리를 담지도 않는다.

박 = 데뷔 이후 지금까지 노래를 모아 20곡 정도 부를 계획이다.

- 공연 이후 활동에 변화가 있을까.

정 =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쭉….

박 = 이 사람이 단언을 많이 한다. 사람의 일을 어떻게 알겠나. 어떤 느낌이 자기한테 쑥 들어와서 다시 노래를 만들 수도 있다.

정 = 나한테 노래는 굉장히 중요했다. 나를 표현하고 실천하는 도구였다. 노래를 다시 시작한다면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무렇게나 섣불리 시작해 그만둘 수 있는 일은 아니다.

- 노래를 만들고 부르면 적어도 자신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정 = 내 속에서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 노래가 나오는데 일부러 억압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안 나온다. 더 이상 그런 게 나오지 않는다.

그의 노래 가운데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곡이 있다.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긴 낭송 뒤에 노래가 이어진다.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방문은 꼭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어….”

기자는 아직 그 노래에 버금가는 기사를 읽지 못했다. 쓰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노래를 그만 부르겠단다. 이번이 마지막 정규공연이란다. 10월27일부터 11월1일까지만이란다. 공연 문의는 02-3272-2334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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