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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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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 오브 로

등록 2009-09-23 11:21 수정 2020-05-03 04:25

‘룰 오브 로’(rule of law). 법의 지배, 법치, 법과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다양한 번역이 가능한 이 용어는 오늘날 민주주의·인권과 함께 세계적으로 승인된 국가 운영의 확고한 원칙 중 하나다. 2005년 유엔 사무총장이 내놓은 ‘더 많은 자유: 모두를 위한 발전과 안보, 인권을 향하여’라는 보고서의 한 대목. “법의 지배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는 정의롭고 기회가 균등하며 안정된 세상을 위한 핵심 가치다.” 신생 국가, 사회주의에서 시장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나라, 내전 등 혼란을 거쳐 안정을 찾아가는 나라 등에 꼭 필요한 것으로 국제사회가 주문하는 것도 바로 ‘룰 오브 로’다. 법이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 특정인의 자의적인 판단이 법을 농단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오늘날 나라꼴을 갖췄다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구현돼야 할 원칙이다. 애초 법이란 게 뭔가 곡진한 이유가 있으니 만든 것 아닌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꼭 지킬 필요가 있으니 생긴 것 아닌가. 법을 어겼으면 누구나 공평하게 그 대가를 치르면 된다.
그런데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집행해야 할 사람들이 앞장서 “법은 경우에 따라 안 지켜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법을 어겼어도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한다. 다들 짐작하다시피, 대한민국 국회의 인사청문회 풍경이다. 위장 전입이나 부동산 다운계약서 작성 혐의에 대해 관행이라거나, 당시엔 꼭 지켜야 할 법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거나,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묻는다. 그런 불법 행위를 관행으로 만들고,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이라는 인식을 퍼뜨리고, 중대한 사안이 아닌 것처럼 조장한 장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당신들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혹은 부유한 계층으로 일찍이 편입됐으면서, 한 푼이라도 더 재산을 불리고자 혹은 자녀를 남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올려놓고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평범한 양심인의 자세마저 걸레처럼 팽개쳐버린 당신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걸레로 양심을 쓱 닦고서 얼굴을 한 번 훔치고서 고위 공직자가 되겠노라고 청문회장 후보자석에 땀 뻘뻘 흘리며 앉아 있는 당신들. 바로 당신들이 그런 관행과 준법의식 마비와 도덕성 결여를 조장해온 장본인이다. 그러고선 되레 남 탓이다.
위장 전입이나 다운계약서 따위가 불법으로 규정된 이유는 이를 막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괜한 법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병역 기피는 불법이다. 하지만 병역 기피를 감행하는 이들은 그다지 양심에 꺼려하지 않는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선량한 시민들을 바보 취급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훗날 국회 인사청문회 후보자석에 앉아 “당시엔 관행이었고, 가능하다면 피하는 게 좋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그다지 중대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변명할 것이다(물론 지금도 병역 의무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회피한 이들이 고위 공직에 혹은 후보자 지위에 올라 있다).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자가 법을 우습게 여기는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다. 홍석현(60) 회장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삼성 X파일 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출석하지 않고 있다. 과태료 처분을 받고도 또 불출석했다. 법원이 발부한 구인장은 휴지 조각이다. ‘회사 행사’ 때문에 못 나오겠다고 하고는 그만이다. 과태료 300만원이야 그에겐 휴지 조각보다 못한 돈일 것이다.
대한민국 법 집행의 책임자로서 물색없게도 갖은 의혹의 백화점으로 지목된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그러고도 ‘사형 집행’을 입에 올린다. “취임하면 진지하게, 정말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나? 스스로 법을 어긴 자의 손끝에서 나온 서명에 따라, 법의 이름으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법의 의미는 얼마나 뒤죽박죽이 될까.
이 모든 역설들로써 ‘룰 오브 로’는 끝났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선 후보자들은 차라리 시민불복종 운동을 선언하라. 법 같지 않은 법은 무시하자고 선동하라. 법의 파탄을 선포하라. 현대 세계에서 나라꼴을 갖춘 국가라면 반드시 존중해야 할 원칙, ‘룰 오브 로’에 작별을 고하라.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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