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우편’이 문제가 되고 있다. 청와대와 신영철 대법관이 용산 참사와 촛불집회 재판 때 경찰과 사법부에 일정한 방향을 지시하는 (불법성의 혐의가 대단히 높은) 전자우편을 보냈다는 시비에 휩쓸려 있고, 또 한 번의 사법 파동까지 예고되고 있다. 이는 우리 대통령께서 자신이 ‘주식회사 코리아의 최고경영자(CEO)’임을 내외에 천명하는 순간에 이미 예견된 바이다.
주식회사 코리아의 ‘인트라넷’
외람되지만, 나는 지난해 언젠가 이 ‘CEO 대통령’이나 ‘주식회사 코리아’ 담론이 가진 어불성설을 이 지면에서 지적한 적이 있거니와, 현재의 전자우편 파동은 당시 내 논지를 확장해보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사태라고 생각한다. 나라와 주식회사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조직이다. 전자는 모든 성원들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목표로 하여 연대와 민주주의를 원리로 조직되는 사회이지만, 후자는 주주 가치의 극대화라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에 맞춰 모든 것이 CEO의 명령 아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조직원들의 대량 해고조차 벌어질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것이 대략의 논지였다.
본래 국가 기구의 운영은 전자에 해당하는 민주주의의 여러 원칙들- 법치주의라든가 삼권분립 등- 에 근거하도록 돼 있다. 반면 CEO 대통령 아래에서 굴러가는 ‘회사 조직’이 의사결정과 운영에서 항상 규정에 의해 구속받고 이를 바꿀 때마다 사사건건 주주총회와 이사회의 재가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내’에 구축된 ‘인트라넷’이 괜히 있는가. 회사 상급자의 전자우편 하나로 조직 전체의 의중이 모든 ‘조직원’들에게 빠르게 전달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가 ‘CEO 대통령’ 어쩌고 하는 담론에 도취돼 현 정권을 선택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단 말인가. ‘주식회사 코리아’가 사사건건 ‘법과 질서’의 규칙에 구속받고 굴러가야 한다면 어찌 ‘다이내믹 코리아’라 하겠으며 ‘747’(연평균 7%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세계 7위 경제대국)의 위업은 또 어찌 달성하겠는가. 놀라는 척하지 말자. 우리 모두의 업보이다.
이번 사건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전자우편을 통한 편법 행정’이 아니다. 한국의 엘리트 계층이 어떠한 의식 수준을 가진 집단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행정부의 말단 집행기구로서 눌려 있는 경찰 조직은 그렇다 치자. 헌법에 명시된 삼권분립의 원칙으로 철저한 독립성을 보장받고 또 이를 누려야 할 사법부의 구성원들 일부가 보여준 행태를 보라. 본래 어느 사회이든 엘리트에 해당하는 집단들은 자신들의 고유 기능의 독자성과 신성함을 주장하며 그것이 침해되면 즉시 어금니를 드러내는 것이 정상이다. 그들이 꼭 도덕적이고 양심적이어서만이 아니다. 자신들 고유 영역의 독자성이 침해되는 것을 방치했다가는 중장기적으로 집단 전체의 위상이 격하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 독립성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운위되는 김병로 초대 대법관 같은 이들의 행보는 어찌 보면 우리 나라 법조인들의 집단적 이익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법조 엘리트의 일부가 그까짓 ‘정권의 코드’라는, 기껏 5년에 한 번씩 교체되게 마련인 하루살이 집단에의 자발적 충성이라는 한심한 동기로 자신들 집단 내부의 불문율과 같은 행동 코드를 헌신짝처럼 여긴 것이다. 나는 법조인도 아니고 법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건만,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한국 엘리트 집단의 자긍심이나 행동 원칙의 부재를 보고서 허탈하기 짝이 없다. 법과 질서라는 원칙의 최후 보루를 지키는 법조 엘리트들이 기껏 정권의 눈치를 보며 ‘멜질’이나 하는 이들이라니. 창피하다. 우리나라 엘리트들은 고상한 철학이고 원칙이고 윤리이고를 떠나서 그야말로 흔한 ‘곤조’(근성)조차 없단 말인가.
그 흔한 ‘곤조’조차 없다니신영철 대법관과 이용훈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의 행동이 법을 어긴 것인지, 어떤 조치가 합당한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형식적 판단과 무관하게 현재 불거진 사태 자체가 이미 한국 사법부의 명예에 있는 대로 먹칠한 ‘스캔들’이며, 나아가 법조계조차 ‘주식회사 코리아’로 빨려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국민적 망신’이다. 이제야 우리는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CEO 대통령’을 모신 ‘주식회사 코리아’라는 것이 어떤 모습의 사회인지.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번호로 홍기빈 연구위원의 ‘노 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홍 연구위원은 경제칼럼으로 지면을 옮겨 독자 여러분을 만나게 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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