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올해는 1년에 한 번뿐인 즐거운 골든글로브 시상식 구경이 불가한 일이 되고 말았다. 바로 미국작가조합(WGA·Writer Guild of America)의 파업 때문이다. 지난 2007년 11월5일부터 ‘DVD 판매액 지분 인상과 인터넷과 휴대폰 등 뉴미디어 방송, 판매 분에 대한 지분 계약’을 요구하며 시작된 2007~2008 WGA 파업은 벌써 10주가 넘게 장기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급기야 1월13일로 예정돼 있던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레드 카펫을 걷고, 간단한 수상자 발표로 대체해버렸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마음으로 그나마 2월24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기다려볼까 했더니, 이 역시 시상식은 예정대로 열릴 예정이지만 WGA 조합원이 불참하는 것은 물론 이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미국배우조합(SAG·Screen Actors Guild) 배우들이 대다수 불참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카데미 선거인단에 포함된 WGA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한 표를 이 ‘파업 결의’에 던질 가능성이 높다. 10주째 자신들의 협상 제안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영화 & TV 프로듀서 연맹’(AMPTP·Alliance of Motion Picture and Television Producers)의 6대 대기업(제너럴 일렉트릭, 뉴스 콤, 소니, 타임워너, 바이아콤, 월트 디즈니 컴퍼니)이 만든 영화들의 수상을 막기 위해 작가들은 연대할 것이고 이로서 아카데미 수상작의 방향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다.
골든글로브도, 아카데미도 없이…
하지만 이들의 파업으로 인해 드레스 입을 기회를 빼앗기고, 방송 중단으로 인해 막대한 수입 손해를 받아들여야 하는 배우들은 오히려 작가들의 편에 서서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나는 작가들을 지지한다. 그들은 창작 작업을 함께하는 형제이자 자매이고, 그들이 만드는 대사와 각본이 없다면 배우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도 집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무도 오랫동안 실업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유목민이다.” 의 ‘석호필’ 웬트워스 밀러의 파업 지지 발언은 이 사태를 바라보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관점을 대변해준다. 그들에게 작가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은 곧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다. 권리를 빼앗긴 작가들이 만들어낸 패배의식에 젖은 허약한 대본을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영리한 선택이다.
지난 5년간 한국 방송의 콘텐츠 질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트렌드 드라마를 벗어난 튼튼한 장르물이 탄생하고 있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오락 프로그램들도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발전된 콘텐츠를 만드는 작가들을 위한 시스템은 거의 제자리 수준이다. 방송사에 소속된 ‘직원’인 PD와 프로그램별로 일하게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작가의 관계가 수평적이라고 생각하기란 힘들다. 그나마 오락, 교양 프로그램의 작가들에 비해 안정적인 수입과 권리를 누리고 있는 드라마 작가라고 해도 일정 이상의 유명세를 획득하기 전에는 아이디어를 뺏기고, 노동력만 착취당한 채 버려지기 일쑤다. 작가뿐 아니라 계약직 스태프들에 대한 아무런 시스템도 만들어져 있지 않은 상태다. 여전히 그들은 한 주의 ‘바우처’에 희비가 엇갈리고, 방송이 ‘죽는 것’이 곧 수입 감소로 이어지는 이 이상한 시스템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 결국 이 방송정글에서의 생존을 위한 각개전투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는 꿈도, 연대의 의지도 앗아가고 말았다. 아무리 실력 있는 구성작가라 해도 PD와 불화가 생기면 그날로 짐을 싸 방송사를 떠나야 하는 씁쓸한 현장을 목도한 바 있는 사람으로서는 할리우드 작가들의 파업 소식은 오히려 달콤하게 들릴 정도다.
독한 ‘홀로’보다 시스템이 잉태한 ‘공존’을
연대란 이기심들이 만들어낸 화염병이 아니라, 공존에 대한 인식이 축조한 아름다운 탑이다. 이제 더 이상 “피고름으로 쓴 대본” 운운하며 홀로 독하게 성공한 작가들이 만들어낸 콤플렉스 가득한 결과물을 보고 싶지 않다. 실력으로 승부하고 그에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잉태한 건강한 작가들을 만나고 싶다. 미국에서 날아온 이 10주가 넘는 파업 뉴스가 투쟁 의지나 연대의 필요성을 잊어버린 한국의 작가들을 자극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작가들이 감독들과 배우들과 진행자들과 동등하게 권리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나는 기꺼이 ‘석호필’의 행방을 모른 채 10주를 기다릴 수 있다. ‘하박사님’의 몇 년 전 모습을 복습하면서 그 인고의 시간을 참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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