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은하 〈매거진 t〉 편집장
“총각, 사진 찍지 말어~.” 할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이어지는 남자의 대답. “아… 정말 캄사합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통칭 ‘북촌 한옥마을’이라고 불리는 이 동네에서는 요즘 이런 엇갈린 대화가 자주 오간다. 카메라를 든 외국 관광객은 계단에서 쉬고 있는 노인을 향해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고, 이런 상황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닌 할머니는 치장도 안 한 모습을 허락도 없이 찍어대는 저 벽안의 총각이 반가울 리 없다.
망원렌즈에 습격당하다
“헉! 놀랐잖아요.” 지난 주말, 재활용품을 버리려고 부스스한 몰골로 대문을 열었을 때, 나는 놀라서 바로 대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대포처럼 큰 망원렌즈를 든 한 남자의 습격. 그는 꽃단장한 여자친구를 문 앞에 세워놓고 나름대로 ‘화보촬영’ 중이었다. 예상치 않은 손님들의 등장에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물론 어떤 사과의 인사도 남겨놓지 않은 채. 결국 조용히 페트병 꾸러미를 문 앞에 내려놓고 나는 생각했다. “휴, 이제 쓰레기도 밤에 버려야겠군.”
블로거들의 천국, 출사의 고향. 웰컴 투 코리아. 최근 삼청동과 가회동의 주말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짐짓 기괴하기까지 하다. 한쪽엔 거대한 카메라를 어깨에 멘 DSLR(디지털일안반사) 부대가 열 맞춰 행군하고, 다른 한쪽엔 이 ‘도심형 민속촌’을 ‘한국의 추억’ 폴더에 넣기 위한 용병대가 예고 없이 출몰하는 동네. 이곳은 주말마다 ‘대한민국 사진대전(大戰)’이 한창이다.
고래등 같은 한옥, 그 옆 머슴방 같은 곳에서 이제 겨우 반 년을 살면서 나는 꽤나 흥미롭게 이 풍경을 지켜보고 있다. 서울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가장 한국다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어쩌다 보니 가장 이국적인 동네가 되어버린 이곳. 사실 외국인들에게 북촌은 그들이 꿈꾸었던 ‘한국’ 그 자체일 것이다. 게다가 수염 기른 노인이나 저고리 입은 할머니라니! 이국적 풍경을 찾아헤매는 하이에나 같은 관광객을 기꺼이 파렴치한으로 만들 매력적인 피사체임이 분명하다. 우리도 외국에 가면 어떤 ‘익스큐즈’도 없이 그들의 파란 눈과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향해 불쑥불쑥 호기심 어린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던가.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이 동네에서 마주치는 한국 젊은이들이다. 그들이 강박적인 수준으로 찍어대는 한옥마을은 그 자체로 비행기나 시차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이국의 땅이다. 기와지붕과 골목길이 아니라 시멘트 벽과 아스팔트를 밟고 자라난 세대에게 한옥에 대한 향수 따위는 없다. 그것은 매끈한 도시의 빌딩보다 신기한 구조물이며, 네덜란드의 풍차만큼이나 이국적인 배경인 것이다.
‘트루먼’ 중 한 사람으로서의 당부
사실 몇 년 전 가회동에 반하고, 급기야 이사까지 온 사람으로서 이 동네를 향하는 순수한 카메라 행렬에 던질 돌 따위는 없다. 대신 이 ‘세트’에서 살고 있는 ‘트루먼’ 중 한 명으로서 당부는 생겼다. 지금 당신이 렌즈를 들이미는 그 대상이 진짜 숨을 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지금 삼각대를 놓는 그 공간이 누군가 오랫동안 살았던, 그리고 여전히 살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는 것을 부디 기억해주시길. 당신의 주말 출사, 피사체에 대한 예의와 배려는 그 어떤 필터나 망원렌즈보다 먼저 챙겨야 할 필수 준비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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