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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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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저널리즘

등록 2007-08-10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만약 당신의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포토저널리즘의 전설 로버트 카파의 말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되씹곤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태가 안타까움과 충격, 분노와 함께 심한 무력감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최대한 다가가라’는 언론의 대명제가 이번 사태에서 ‘실종’된 게 이유입니다.
지난 7월19일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 피랍된 이후 우리 언론은 ‘번역 저널리즘’ 신세에 가깝습니다. 〈AP〉 〈AFP〉 〈CBS〉 〈CNN〉 〈NHK〉 <aip> 등 해외 언론들이 쏟아내는 정보를 하릴없이 옮기는 데 바쁩니다. 퍼즐 게임처럼 이들 정보 조각을 모아 전체상을 재구성해보지만 야속하게도 모양이 자꾸 어긋납니다. 그 결과는 여차하면 오보의 수렁이고, 갈팡질팡입니다. “군사작전이 시작됐다”는 한 통신사의 보도에 가슴이 콩알만 해졌다가, 2시간 뒤에 해당 언론사가 “사실 무근”이라고 기사를 취소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무기력한 일들이 크고 작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황당스런 일도 벌어집니다. 피랍 사태 발생 뒤 정부 대표단이 아프간으로 가고 청와대 안보실장까지 특사로 파견됐으나, 그곳에서 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외신의 몫입니다. 아프간 정부가 제대로 탈레반과 협상을 하고 있는지도 외부의 시선으로 전달될 뿐입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절박함을 담은 우리 시각으로 피랍 사태를 전하는 현장 보도가 부족합니다. 아프간 현지 언론이나 프리랜서 언론인 등을 동원해 백방으로 현장에 접근하고 있지만 아쉬움이 큽니다.
물론 언론의 무기력만을 나무라기는 어렵습니다. 피랍 사태 이후 정부는 아프간 정부에 한국 기자의 입국 금지를 요청했습니다. 안전과 알 권리 사이에서 안전을 우선 고려한 조처로, 현재 정상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아프간을 취재할 길은 없습니다. 또 설령 당장 아프간으로 달려간대도 정확한 정보를 얻어낼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충분하지 않은 게 우리 언론의 현주소입니다.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줄어들까요. 인질들이 억류된 위험 지역 가즈니주는 몰라도 수도 카불만큼은 열어달라고 정부에 강하게 요구하는 언론이나 기자단체가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체념하고 무력감에 안주하는 것 아니냐는 질책이 귓가를 맴돕니다. 뒷날 누군가 “그때 너희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때 대답할 게 마땅치 않으니 답답합니다. 우리 언론이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아프간 현장 취재 금지에 대한 정부의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로버트 카파는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41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죽음으로써 ‘현장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a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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