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전교조 창립 기념 전국교사대회에 다녀오는 버스 안에서 영화 를 보았다. 부모 없이 사는 형제의 연애 이야기였다. 대회를 마치고 전세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 옮겨가는 동안 비를 많이 맞았다. 옷과 신발이 젖어 눅눅했다. 우리 밀양지회에서 함께 간 사람은 스물네댓 명, 꼬맹이들도 함께 데리고 간 가족 동반 서울 나들이기도 했다.

컴컴한 버스 안, 꼬맹이들은 뒷좌석에서 하나둘 엎어져 자고, 어른들은 캔맥주를 따고 오징어포를 뜯으며 교사 대회 뒷이야기들을 주워섬긴다. 누군가 “영화나 한 푸로 땡깁시더” 하니, 하나둘 앞좌석으로 모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속아주고 싶다
버스는 참 빨리도 달린다. 버스 안은 컬러 화면만이 번쩍번쩍한다. 하루를 마치는 시간, 습관처럼 쓸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영화가 제법 재밌는 모양이다. 나도 냉큼 합류한다. 쉰이 다 된 선생님들이 별로 우습지도 않은 장면에 어린아이처럼 웃고 구른다. 그 때문에 장면을 놓친 몇몇은 “뭔데? 뭔데? 방금 머라 캤는데?”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귀 밝은 이는 재빨리 상황을 복기해주고, 그렇게 영화 한 편으로 차 안에 활기가 돈다.
광식이 광태 형제는 삼풍백화점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그 보상금으로 형은 사진관, 동생은 비디오 가게를 하며 산다. 대학 후배를 7년간 좋아하다가, 숱한 오해와 엇갈리는 우연속에서 떠나보내는 소심한 ‘평화유지군’ 광식이는 좀 심하게 착해서,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오직 ‘허리 아래쪽’ 일에만 몰두하는 광식이 동생 광태는 귀엽고 무구한, 백치 같은 영혼이다. 그런 그들이 사랑을 조금씩 배워간다. 뻔하디뻔한 스토리라인이지만, 도시내기 젊은이들의 탱글탱글한 언어, 감정의 누선을 적절하게 쥐락펴락하는 음악, 쓸쓸함과 코믹함 사이를 잽싸게 오가는 카메라의 발걸음까지 모두 재치가 넘친다. 그렇지만 ‘연애’라는 삶의 한 국부만을 지치도록 비추는 이 영화에서 값싼 상업성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버스 안에서는 그냥 속아주고만 싶다. 우리도 생업의 공간, 학교에서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슴속 불붙는 희미한 갈증으로 몸을 비틀기도 했다. 서울에서 1만 명이나 되는 ‘동지’들을 만났을 때, 불끈 힘이 솟기도 했지만 금세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 우리 교육에는 이제 답이 없다. 그리고, 여기저기 한귀퉁이가 무너져내리는 소리만 가득하다. 그 많은 교사들이 그토록 힘써 버팅기건만, 우리 교육은 왜 이 모양일까.
영화 한 편에 과하게 행복해하는 이유가 또 있다. 우리가 돌아가면, 모두 합쳐 마흔두 명이 그 작은 시가지를 뽕짝 메들리로 칠갑을 하는 선거판의 나머지 며칠을 겪어야 한다. 이념적으로는 극우, 경제적으로는 지역 토호, 직업상으로는 대개 건설업자, 자영업자, 전직 공무원, 감투만 열댓 개씩 주렁주렁 매단 그들은 시내에서 그 누구에게나 허리가 꺾어져라 인사를 한다. 지역 토호의 재산 일부를 일부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소득 재분배’ 기능만이 유일하게 긍정적인 이 선거, ‘지방’은 없고 ‘선거’만 남은 ‘지방 선거’, 커터칼 한 자루가 일찌감치 상황을 종료시키고 모든 풀뿌리들의 삶의 의제를 틀어막은 이 절망적인 선거판을 그렇게 지켜보아야 한다.
‘평화유지군’ 광식이가 가르쳐준 노래
영화가 끝나고, 우리 사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가 잠든 깊은 밤, 아파트 베란다로 나와 담배 한 대를 빼어문다. 잠적했던 광식이가 여자 후배 결혼식장으로 뛰쳐들어와 무례하게도, 또 유치하게도, 축가랍시고 불러젖히던 노래 한 소절을 나도 흥얼거려 본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하안~ 그으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그래, 그래, 미끈하게 잘 넘어간다. 사는 일이 이리 신산해도 내일부터 또 열심히 살자. 조간신문 한 부에 담긴 세상의 편린들을 파노라마처럼 이어붙이기만 해도 이 시대는 그저 화탕지옥이 아니냐. 세상일도, 내 인생의 숙제도,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릴 것 같진 않은데, 어쩌랴, 무어든 꼼지락거리는 것밖에 달리 무슨 수가 있나. 그래도 지금 여기는 우리 인생의 고마운 근거지가 아니냐. 슬픔은 우리의 것, 쓸쓸함은 나의 양식, 환멸도 슬픔도 묻어두고, 그렇게 구죽죽한 희망가를 부른다. ‘평화유지군’ 광식이가 가르쳐준 노래,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하안~”.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김병기 아내 ‘사모총장’…텔레그램 도용, 커피 시키더니 그새 한 듯” [단독] “김병기 아내 ‘사모총장’…텔레그램 도용, 커피 시키더니 그새 한 듯”](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6/53_17667318922856_4217667318702388.jpg)
[단독] “김병기 아내 ‘사모총장’…텔레그램 도용, 커피 시키더니 그새 한 듯”

회사 팔리자 6억4천만원씩 보너스…“직원들께 보답해야지요”

나경원 “통일교 갔었다” 첫 인정…한학자 만남 여부엔 “한 번도 없어”
![건강검진 정상인데, 왜 이렇게 어지럽고 머리가 아플까? [건강한겨레] 건강검진 정상인데, 왜 이렇게 어지럽고 머리가 아플까? [건강한겨레]](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5/53_17666328279211_20251225500964.jpg)
건강검진 정상인데, 왜 이렇게 어지럽고 머리가 아플까? [건강한겨레]

‘김정은 집사’ 김창선 사망…북 “깊은 애도”

김병기 “아들 좀 도와줘”…국정원 첩보 업무까지 의원실에 손 뻗쳐
![[단독] 특검 “김동희 검사, 쿠팡 김앤장 변호사에 대검 지시사항 유출” [단독] 특검 “김동희 검사, 쿠팡 김앤장 변호사에 대검 지시사항 유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6/53_17667259557028_7817667259402608.jpg)
[단독] 특검 “김동희 검사, 쿠팡 김앤장 변호사에 대검 지시사항 유출”
![서학개미들이여, 쿠팡 주식을 사자 [뉴스룸에서] 서학개미들이여, 쿠팡 주식을 사자 [뉴스룸에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5/1225/20251225500099.jpg)
서학개미들이여, 쿠팡 주식을 사자 [뉴스룸에서]

전우원, 전두환과 찍은 사진 공개…“차라리 태어나지 말걸”

믿고 샀는데 수도꼭지 ‘펑’…쿠팡 책임 없다는 ‘판매자로켓’에 소비자 끙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