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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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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라 코리안타임

등록 2006-03-2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 국문학과

미국 어린이집 보육비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쌀 거야 예상했던 터지만, 보육료 일람 아래 붙어 있는 단서조항은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종일반은 근 100만원, 주 3일반은 60만원쯤. 그리고 아랜 깜박깜박, 데리러 오는 시간에 늦을 때마다 15분당 10달러를 청구하게 돼 있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1분당 1달러로 계산해 즉석에서 지불할 수 있다는 부언도 함께.

규칙보다는 리듬을

흐~음. 그걸 보고 나니 우리 동네 어린이집이 새삼 고마워졌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보육료는 한 달 15만원 남짓. 50%는 국가 보조라고 들었는데, 9시부터 5시까지 맡길 수 있는 종일반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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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일이 원칙이지만 토요일에도 아이를 맡아주고, 가끔 늦어서 조마조마 전화를 할 때마다 선생님은 “예,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하곤 한다. 입학설명회 때 신신당부도 “일찍 데려다놓으셔도 좋습니다. 대신 지각하진 마십시오.”였다. 선생님들의 노동 부담이 걱정되긴 하지만, 나로선 정말 고마운 일이다.

자아, 그러나,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시내에 나설 때마다 이건 얼마나 남았을까,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다. 요 몇 년 사이 딴청 부리듯 사라진 게 워낙 많아 그렇다. 버스 안에서 가방 받아주기, 10년… 노약자석에 대충 앉기, 1년. 왜 사라졌는지 알 법한 게 있는가 하면 도통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서울 전철에서 노약자석이 비어 있기 시작한 건 요 몇 달 사이인 듯싶은데, 나로선 영 까닭이 짚이지 않는다. 그맘때 ‘젊은이, 꼭 이 자리에 앉아야겠수?’라는 만화체 스티커가 등장했던 게 기억나지만, 설마?

노약자석을 둘러싸고 티격태격하던 데 비하면 늘 얌전히 비어 있는 노약자석은 자못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렇지만 사람들 빼곡히 서 있는 러시아워에도 비어 있는 노약자석을 보면, 마음 한켠이 허전하기도 하다. 철두철미 노약자석을 비워두는 일본 사람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동시 좀 징그러워하기도 했던 것이 불과 5~6년 전이건만.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공유할 수 있는 리듬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편이므로, 판단 기준을 온통 법과 제도에 미뤄버리는 광경은 늘 조금 불편하다. 공통의 리듬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그만큼, 딱 그 선에서 규칙이 끊임없이 조율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그러나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고, 우리는 성문법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상적인 조화란 도무지 달성되지 않는다. 중국 대도시의 풍경을, 신호등 따위는 태연히 무시하고 적당히 차와 자전거와 사람이 얽혀 흘러가는 그런 풍경을 사랑했지만, 혼잡이 극에 달한 서울에서 같은 방법을 채용할 수는 없으리라. 중국 역시 이 몇 년 사이 신호등을 지키는 습관이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공통의 감각이 아득해질수록 법과 규칙은 무쌍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법대로 하자고!” 하하, 100여 년 전 독립협회 회원들이 갈망했던 게 바로 이것, 공평무사한 ‘법’이 지배하는 세계였건만.

법의 세계에서 길을 읽다

아마 세상은 돌고 도나 보다. 나는 이제 법과 규칙의 지배에서 무능력의 냄새를 맡고 있으니 말이다. 신호등을 지키시오, 예. 노약자석에 앉지 마시오, 예. 무거워 보이는 가방은 들어주시오… 예에? 몇 년이 지나면, 일본인들처럼, 전철에 타면 얌전히 휴대전화를 눌러 끄고, 미국인들처럼, 1분당 지각 벌금을 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변화는 한편으론 진보겠지만, 한편으론 위축을, 결여를 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수십 년 동안 ‘코리안타임’의 불명예와 어지간히 싸워왔건만, 대신 우리가 들어서고 있는 이 낯선 세계는 무엇일까. 사라져가는 걸 그리워하다간 비겁해지기 십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가끔 미아 같은 기분이 든다. 낯선 곳을 헤매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그래도 길을 잃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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