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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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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럽다, 국기 치워라

등록 2006-01-20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촌스럽다, 국기 치워라.”
6년 전의 일입니다. 2000년 9월 <한겨레21>에서 ‘아시아 네트워크’ 지면을 처음으로 운용할 때입니다. 특정한 주제와 관련된 아시아 여러 나라 기자들의 글을 모아 싣는 새로운 실험이었습니다. 각 기자들의 지면에는 얼굴 사진과 함께 그가 속한 나라의 국기가 앞머리에 실렸습니다. 디자인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지면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잡지가 나오자마자 인도 기자로부터 항의가 왔습니다. “웬 국기냐. 글 쓰기 창피하다”는 거였습니다. 일본·싱가포르 기자도 같은 뜻을 전했습니다. 납득이 안 됐습니다. 국기, 그게 어때서? 다들 국적이 있고, 나라마다 상징하는 깃발이 있는 거 아닌가? 저는 그저 그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탓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그들은 개인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겁니다. 국가적 경계와 이익을 초월한다는 ‘아시아 네트워크’의 정신에도 국기는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었습니다. 제 휴대전화의 액정 화면에는 ‘인간 고경태’라는 이름이 떠 있습니다. ‘국민 고경태’라고 해놓는다면 얼마나 엽기적일까요. ‘아시아 네트워크’에 국기 디자인을 계속 고집했다면 그와 똑같은 경우가 됐을 겁니다.

한겨레신문사 사옥 들머리에는 태극기가 휘날립니다. 덕분에 비판을 피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4~5년 전이었습니다. 한 미디어 비평지에서 신문사들의 태극기 게양 실태를 조사한 겁니다. 결국 ‘감히’ 게양하지 않거나 더러운 상태로 달았던 일부 신문사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신문사가 동사무소입니까? 국방부입니까? 국가기관은커녕 국가기관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곳에 퍼부어진 시비는 너무나 사소한 시간낭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위험합니다. 요즘 돌아가는 기류를 보면 그렇습니다. <한겨레21>은 지지난호(592호) 표지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다뤘습니다. 이 불씨가 뒤늦게 인터넷 포털로 옮겨붙으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네이버 검색창에서 그 키워드를 한번 쳐보십시오. 문제의 <한겨레21> 기사들이 좌르르 뜹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없애자’는 제하의 메인 기사에는 댓글이 4500개 이상 붙었습니다. 그중 4400여 개는 악플이나 욕플로 보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북한에 가서 살아라.” “니들은 월드컵도 보지 마라.” 다음과 네이버에서 실시한 라이브 폴에서도 그들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맹세를 그냥 유지하자는 의견이 폐지 쪽보다 6:4 정도로 더 많았습니다.

<한겨레21>은 이번호에도 ‘국기에 대한 맹세’의 역사를 추적했습니다. 그 탄생의 비밀은 너무 조잡했습니다. 아니, 애틋하다 해야 할까요? 겨우 ‘하룻밤’ 만에 만들어진 맹세문은 지금 만리장성의 세월을 쌓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래봤자 허무하다는 걸 압니다. <한겨레21>은 또다시 반애국 매체로 낙인찍힐 겁니다. 병원에 가서 애국심 링거주사라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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