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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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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같은 아메리카

등록 2005-09-1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로맨스 때문에 자살할지언정, 생계 때문에 자살하지는 않는다.”
2년 전, 베트남의 한 방송사 간부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살지만, 적어도 한국처럼 돈으로 고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없다는 자부심이 얼핏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더 행복하다는 표현을 쓰기는 어렵습니다. 고급 승용차나 휴대전화가 정신적인 충만함의 절대조건은 아닙니다. 실제 얼마 전에 조사된 세계인의 행복지수를 보아도 한국은 베트남보다 20위나 뒤처져 있습니다. 인근의 다른 동남아 국가 중에도 한국을 제친 곳들이 많습니다. 사람이건 나라건, 못산다고 깔봐선 안 됩니다.
역의 논리도 성립합니다.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큰 나라라고 무조건 우러러볼 필요는 없겠지요.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뭉개진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비극에서 그런 깨우침을 얻습니다. 저는 재난 현장에 투입되려던 일부 경찰과 소방관들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전율했습니다. 그곳에 ‘미담’은 없었습니다. 서로 총기로 무장해 자신의 재산을 지켜야만 하는 현실엔 목숨을 건 악다구니만이 있었습니다. 저는 ‘미개’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세계 초강국의 지위를 자랑하는 문명세계의 시스템은 너무나 미개하게, 반문명적으로 유지돼왔던 겁니다.

한가위엔 뭉클한 뉴스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맞춰 가족을 매개로 한 기획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미국보다 더 중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대한민국과 가장 친한 ‘우방’이 아닙니까. 표지로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빈정거리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가 미국을 잘 몰랐다는 자성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라크 침략으로 대표되는 ‘야만’의 코드 뒤엔 무엇이 숨어 있습니까. 미국은 싸움을 잘합니다. 1970년대 베트남전에서 큰 코를 크게 다친 이후론, 어느 나라와의 ‘에이매치’에서도 전승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의 갈등 구조가 어느 순간에 폭발하면서 허망하게 사라질 수도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공동체는 아직 건강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개탄해 마지않던 한국의 지역주의가 우습게 느껴집니다. 미국의 흑백대결과 인종차별에 비하면 손톱의 때만도 못합니다. 단일민족이라는 뿌리는 협동정신을 함양할 좋은 토대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소모적으로 대한민국을 비하해온 건 아닐까요. 막 미화하고 싶어집니다. 장장 25쪽에 이르는 표지이야기를 꾸미다 보니 그런 착시현상이 일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한국적인 공동체 정신도 살렸습니다. <한겨레21>이 ‘독자 공동체’를 위해 푸짐한 선물꾸러미를 마련한 겁니다. 기자들과 직원들이 좌충우돌 뛰어다니며 차려놓은 잔칫상입니다. 창간 이래 명절 때마다 찾아온 퀴즈큰잔치가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빈곤한 독자들은 표지이야기에서 위안을 얻으십시오. 물질적으로 빈곤한 분들은 퀴즈큰잔치에서 행운의 과녁을 겨냥하십시오. 행복한 한가위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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