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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땅에다 묻을 것이지…

등록 2005-08-02 15:00 수정 2020-05-02 19: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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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가끔 황당합니다.
마감날 막판에 큰 사건이 터지면 그렇습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의 주인공은 이건희 삼성 회장입니다. 그가 과연 10년 만에 대검찰청 포토라인에 설 것인가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한창 기사 작성에 열중이던 김창석 기자가 오후 4시께 한숨을 쉽니다. 새로운 속보가 떴기 때문입니다. 옛 안기부 비밀도청조직 ‘미림팀’의 일원이었던 공운영씨. 검찰이 그의 집에서 도청 테이프를 무려 274개나 찾아냈다는 겁니다. 200~300쪽의 녹취 보고서도 13권 압수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뉴스의 무게중심이 급작스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농담처럼 이런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쯧쯧, 땅에다 묻을 것이지.”

녹취록을 계산해봤습니다. 1장당 200자 원고지 10매로 칠 경우, 최대 4만여매에 이릅니다. 이건 <한겨레21>을 1년 내내 만들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 자료만 열심히 공부하면 대한민국 권력 언저리의 밀실정보를 전지전능하게 굽어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검찰은 땡잡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성도 땡잡았습니다. 먼저 터져나온 홍석현-이학수씨의 도청 녹취록은 빙산에 묻은 때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법 대선자금보다 불법 도청이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형국입니다.

누가 더 저질일까요. 홍석현-이학수 커플입니까, 아니면 공운영-김기삼 커플입니까. 삼성그룹입니까, 안기부입니까. 심지어 <중앙일보>입니까, 문화방송입니까. 요즘 <중앙일보>를 보면 기가 뻗치는 표정입니다. 반성하는 척하면서도 “딴 놈들은 깨끗하냐”고 삿대질을 해댑니다. 문화방송이 돈 주고 도청 테이프를 샀을 거라고도 비난합니다. 기자 신분을 속이고 취재했다는 공격도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윤리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저 같아도 돈 주고 샀을 겁니다. 기자 신분 속이면서 취재했을 겁니다. <중앙일보> 기자는 그런 기사를 쓰면서 낯이 간지럽지 않았나 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삼성은 도청 문제에 관한 한 공자 말씀할 처지가 못된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다뤘지만, 삼성SDI는 해고 노동자들의 휴대전화를 위치추적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휴대전화 도청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피해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도청으로 흥한 삼성, 도청으로 망했다”는 속담이 미래에 전해질까 두렵습니다.

도청 테이프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 간에, 모두 솔직해졌으면 합니다. 구차하게 변명하고 떠넘길수록 흉해 보입니다. 삼성과 <중앙일보>가 “죽도록 미안하다, 돌을 던지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닫으면 아름답겠습니다. 불법 도청 행위에 가담한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만 해주면 비판의 의욕이 허망하게 주저앉을 것 같습니다. 허물을 감싸주고픈 마음까지 들 겁니다.

표지이야기에 이은 특집 기사는 일본공산당의 조선인들에 관한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현지 취재는 두달 전에 이뤄졌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밀렸습니다. 상대적으로 시의성이 떨어지다 보니, 긴박한 기획 기사에 한없이 양보를 하게 된 결과입니다. 8주 만입니다. 숙변을 해결하는 기분마저 듭니다. 그들의 감춰진 역사가 빛을 보는 8·15 60돌을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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