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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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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등록 2005-03-09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1988년 서울올릭핌 개최를 앞두고 정부는 테러에 대비한 첩보를 수집한다는 명분으로 경찰로 하여금 ‘위장택시’를 운영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차적도 없는 택시를 구입한 뒤 사복 경찰관이 운전기사 행세를 하며 승객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어 첩보를 수집 분석하는 비상식적인 활동을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당시 <한겨레신문>의 보도로 알려져 정부가 부랴부랴 위장택시 운영을 중단함으로써 다행히 국제적인 망신은 피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의문이 남는 것은 과연 정부가 테러 대비만을 위해 위장택시를 운영했겠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노태우 정권이 올림픽을 빌미로 시중의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그런 불법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여하튼 민심 파악의 생생한 현장이 택시 안임을 입증해 보인 씁쓸한 사건이었다.

십수년 전의 일을 갑자기 되돌아보게 된 것은 며칠 전 야근을 하고 택시를 탄 뒤 기사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꽤나 밤이 깊었는데도 기사는 피곤한 기색 없이 밝은 표정이어서 그 연유를 물어봤다. 기자들도 민심파악을 위해 택시를 타면 습관적으로 기사에게 말을 걸곤 한다. 그는 “손님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보니 경기가 좋아지는 모양이다.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2돌 국회 연설이 있기 전에는 손님들이 대통령의 눈꺼풀 수술에 대해 듣기 민망한 욕설을 서슴지 않더니 ‘통합’을 강조한 연설 이후에는 잠잠해졌다. 그때부터 손님도 늘기 시작했다. 대통령 부인의 눈꺼풀 수술 사실까지 알려졌는데도 왈가왈부하는 손님들을 만날 수 없다. 차츰 민심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다”며 신나해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우리 사회가 따뜻하고 평안한 민심으로 가득하고 모두가 좀더 살 만해졌으면 하는 그런 소박한 희망을…. 비록 우리 주위에서는 희망을 짓밟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지만, 그래도 희망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행정도시건설 특별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일부 의원들이 보여준 난장판은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논란 끝에 호주제 폐지를 뼈대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우리의 가부장적 가족문화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엿보게 된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뇌물 수수 사건으로 줄줄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두명의 여당 의원과 한명의 야당 의원이 수사 선상에 올라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탈권위 시대’의 검찰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장기 불황의 주범으로 건설경기 악화와 부동산 거래 침체가 지목돼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건설 경기는 살리되 부동산 투기는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에서 땀흘려 일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읽게 된다. 한국 축구가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약관의 박주영 선수를 통해 희망을 갖게 되듯이 모든 분야, 모든 현안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만들어나갔으면 좋겠다.

3월의 시작과 함께 <한겨레21>이 창간 11돌을 맞았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셈이다. 봄이 더디게 올 거라는 기상청 예보가 있기는 하지만 <한겨레21>은 지면을 통해 마음의 봄을 힘차게 열어가려 한다. 초등학생에 걸맞게 신선함을 잃지 않으면서 고학년의 세련된 감각으로 희망의 전도사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을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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