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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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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등록 2005-01-07 00:00 수정 2020-05-03 04:23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동·서남 아시아를 덮친 지진해일이 연말연시 지구촌을 충격에 빠뜨렸다. 지진해일이 발생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건만 사상자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뿐 그 집계가 멈추지 않고 있다. 천혜의 휴양지로 꼽히던 몇몇 섬들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고 섬이 수십m씩 이동했다고 하니, 도대체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평소 신혼부부를 비롯한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 피해가 예상보다 적어 다행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가족과 집을 잃은 슬픔과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현지인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피해 지역이 넉넉하지 않은 후진국들이란 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연의 위력 앞에 무기력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씁쓸함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다. 세계 각국이 앞다퉈 난민구호와 피해복구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온정의 손길에 힘입어 피해 지역 주민과 정부가 이번 재앙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전과 다름없는 ‘천년의 미소, 천개의 미소’와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지구촌 사람들과 다시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이번 지진해일 피해가 무방비 상태의 경보 시스템 때문에 커진 측면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있기는 하지만 인재라기보다는 자연재해로 규정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가난은 인재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 대구에서는 가난한 부모에 의해 이불에 싸여 장롱에 보관된 4살짜리 아이의 주검이 발견되면서 우리를 한동안 아노미 현상에 빠뜨렸다. 카드빚에 내몰린 신용불량자들이 속출하고 실직과 소득 감소로 중산층이 급격하게 붕괴되는 장기 불황이 계속되면서 이미 예상됐던 일이기도 하다.

옛부터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오지만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까마득한 시절의 얘기일 터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나라에서 가난 때문에 목숨을 버리고 가족 해체로 아이들이 죽음에 노출돼 있다면 소도 웃을 일이 아닌가 싶다. 때마침 정부가 경제 양극화 문제의 해결을 새해 주요 국정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공언했으니, 예산 타령만 할 게 아니라 이번에는 정말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빈곤층의 실상을 들여다보았으면 한다.

매번 되풀이되는 얘기지만 정부는 고소득 금융·부동산·자영업자들의 소득만 제대로 파악해 세금을 거두어도 빈곤 문제 해결에 필요한 재원을 상당 부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민사회의 지적을 되새겨보아야 한다. <현대 한국 사회의 불평등>(도서출판 한울 펴냄)의 공동 저자인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현재와 같이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부를 독점하는 사회, 그리고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경우처럼 노동을 하더라도 최저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사회는 분명히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다. 21세기 한국의 과제는 이러한 사회 체제를 개혁하는 일이고, 이것은 땀 흘린 만큼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고 진단한 것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인도양의 지진해일보다 훨씬 강력하고 두렵기까지 한 재앙이 이미 들이닥쳤는데도 그 피해자들이 약자인 탓에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치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재앙 못지않게 빈곤의 재앙 또한 많은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긴다는 점을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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