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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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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권과 균형

등록 2004-10-28 00:00 수정 2020-05-03 04:23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 위헌 판결로 우리 사회가 큰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그 충격의 여파는 곧바로 대결 구도를 만들었고, 찬성과 반대로 갈린 목청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고 있다. 당분간 우리 사회는 행정수도 충격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모적인 논쟁과 격렬한 대결에 함몰돼 그 충격이 오래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라크 파병과 탄핵 정국, 과거사 청산 등 국가적 현안으로 몸살을 앓았고, 거기에 장기간의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우리 사회의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터여서 더욱 그렇다.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면 이번 행정수도 파문의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헌재 판결을 존중해 신행정수도 건설을 중단하되, 참여정부의 국가적 어젠다인 지방분권과 국가 균형발전이란 두 축을 활용해 수도권 과밀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나가면 될 일이다. 분권이 소프트웨어라면 균형발전은 하드웨어적인 측면이 강하다. 신행정수도 건설은 하드웨어적인 성격의 정책인데,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만큼 수도권의 다양한 기능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면 애초 의도했던 행정수도 이전, 그 이상의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어찌 보면 행정수도 이전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발전의 프로그램인 분권이다. 지금 대통령과 국회, 사법부가 고민해야 할 대목은 분권이다. 그들이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권한과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하지 않는 한, 진정한 분권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은 자치단체장들이 몸집을 불려 사사건건 최고통치자의 권위에 도전해올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국회의원들은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총선에서 정적(政敵)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똘똘 뭉쳐 분권을 거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방에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방도 이제 중앙 정부로부터 대형 공사나 소득사업을 따내는 데 혈안이 되기보다는 분권이 이뤄질 것에 대비하는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대통령과 국회, 사법부에 “지방의 열악한 구조와 낮은 민도 때문에 분권은 시기상조”라는 어처구니없는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행정수도 파문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듯하다. 청와대와 헌법재판소, 여당과 야당, 수도권과 지방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분노와 질시가 뒤섞여 있다. 승자와 패자로 갈려 이긴 자는 무엇을 얻었는지도 모른 채 뒤돌아서 무조건 웃고 있고, 패한 자는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앞에 나서 격한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10월25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헌재 결정에 따른 법적 효력을 수용하되 국가 균형발전 전략은 어떤 형태로든 추진하겠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해법을 제시한 것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헌재 판결 이후 전개되고 있는 정국 상황이 자신과 정부, 여권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보고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충청권의 민심을 읽으며 2007년 차기 대선 구도의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는 비아냥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민심을 소용돌이에서 건져내고 우리 사회에 다시 에너지를 충만시켜야 할 책임은 바로 노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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