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욱연/ 서강대 교수 · 중국문학
수컷인 남자와 암컷인 여자가 서로를 갈구하는 감정은 동물적인 본능이지만, 연애는 근대 제도의 산물이다. 연애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갖가지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오늘날처럼 연애가 남녀가 만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될 수 없었다.
연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여자들이 규방에서 거리로 나와야 한다. 여자들을 거리로 이끌어낸 최대의 공신인 학교, 그리고 다방이나 교회와 같은 남녀가 만나기 위한 장소가 있어야 하고, 연애편지를 전달해줄 우편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요컨대 연애는 근대 제도의 산물이자, 근대의 발명품이다.
자존심을 담보한 신분상승의 욕망
근대의 숱한 발명품들이 탈근대의 시대에 도전과 위기를 맞으면서 사라지거나 근본 속성이 변하고 있지만 연애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매력을 풍기면서 환영받고 있다. 연애가 왜 그렇게 매력적인가? 우선 내가 사랑하고 같이 살아갈 짝을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고, ‘나는 나다’라는 근대적인 주체관과 연결된 때문이다. 그래서 연애를 위해, 자기가 선택한 사랑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애의 또 다른 매력, 어쩌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영원한 매력은 좀더 세속적인 데 있다. 그것은 연애가 신분상승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이다. 중매는 집안이나 학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맺어지지만 연애는 그야말로 눈만 맞으면 재벌 회장과 백수 사이에도, 슈렉과 공주 사이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
연애를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은 누구나에게 잠재돼 있으되 늘 연애의 신성함에 눌려 억압당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이다. 연애와 신분상승이 운 좋게 결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터이지만 그렇게 양자가 일치하는 경우가 어디 흔한가.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신분상승의 통로가 갈수록 좁아지고 신분이동 채널이 갈수록 경직되어 좀처럼 신분상승의 계단을 오르기가 힘들 때, 연애를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 그 판타지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자본주의의 짙어지는 그늘이 연애를 통한 신분상승 욕망과 판타지의 또 다른 터전인 셈이고, 그럴 때 연애는 로또복권의 꿈이다.
드라마 이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실 구도는 새로울 것이 없다. 백마 탄 왕자와 별 볼일 없는 여자의 사랑 구도에 출생의 비밀이 더해지지만 요즘 드라마의 유행 추세를 감안하면 오히려 식상하다. 그럼에도 새로운 것은 강태영(김정은)이라는 인물이다. 백수와 비정규직을 오가는 신세인 미천한 그녀는 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충분히 기죽을 만한데, 무모할 정도로 당당하고 명랑하며, 두 형제들 사이에 있지만 그들의 노리갯감이나 하녀가 아니다. 자신보다 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경우, 그러니까 연애에 신분상승이 끼어드는 경우 대개는 자신의 감춰진 속된 욕망이 들킨 것 같은 자괴심으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는 한기주(박신양)가 돈이 많다는 것은 그 남자의 보조개가 주는 매력과 같은 차원일 뿐이라고, 그 남자가 지닌 많은 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기주 집안에서 돈을 받은 작은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주듯이, 막막한 처지에 서 있는 옥탑방 인생들의 돈에 대한 속된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그녀 자신을 잃고 완전히 재벌가의 사람으로 변신하여, 내가 아닌 남이 되어 재벌가에 편입해 신분을 상승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젊은 사람들 살아가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막막해지고 있다. 취업도 어렵고 간신히 취업해도 비정규직이 태반이다. 여자들의 경우는 더더욱 어렵다. 기성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는커녕 진입 자체가 어렵다. 짙어가는 한국 자본주의의 그늘 속에서 속의 연애는 그런 기죽은 대한민국 청춘남녀들의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남겨둔 채로 신분 상승의 욕망과 판타지를 건드리고 있고, 그래서 ‘다모 폐인’에 이어 또다시 ‘파리 폐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청춘남녀들은 물론이고 나이와 성별을 넘어 이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으니, 삶의 답답함과 고단함, 절망 속에 갇힌 채 탈출구로서 강태영과 한기주식 연애 판타지, 또 다른 로또복권의 꿈에 젖어 사는 우리 시대 한국인들의 삶이란 대체 얼마나 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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