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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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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과 낙엽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집에서 쉬는 일요일 저녁이면 아이들과 함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한 방송사의 오락 프로그램인데, 주로 연예인을 포함한 방송인들이 10여명씩 한꺼번에 나와 퀴즈를 푸는 내용이다. 퀴즈의 수준도 그저 그렇고 출연자의 신변잡기를 곁들이는 평범한 오락물이지만 한 가지 독특한 진행방식이 눈에 띈다. 출연자 가운데 나이가 많은 5명을 나란히 앉게 한 뒤 ‘낙엽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흥미롭다. ‘낙엽줄’에는 세번의 찬스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5명이 모두 정답을 맞히면 가산점을 주는 것도 재미를 더한다. ‘낙엽줄’의 출연진들이 나이로만 따지면 방송가에서는 한물간 40·50대 이상이어서 어른 대접을 받는 대신, ‘낙엽’들은 덕담으로 ‘새싹’들을 격려한다. 한창 잘나가는 ‘새싹’들과 저물어가는 ‘낙엽’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17대 총선 결과에 따라 우리의 정치 지형을 바꿔나가는 데는 정치인들뿐 아니라 유권자들도 힘을 모아야 한다. 이번 선거를 통해 과연 지역주의와 부패정치 청산의 기반이 제대로 마련됐는지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혹시라도 아쉬움과 부족함이 있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토대를 만들어가면서 강력한 실천 의지를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지역주의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부터, 부패정치는 자유당 시절부터 수십년 동안 악령처럼 따라다니는 것이어서 치유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청산을 서두르다 자칫 미봉책에 그칠 수 있는 만큼, 체계적인 청산 절차와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지역주의와 부패정치 청산이 선거 때마다 되풀이돼온 쟁점인 반면, 세대갈등은 이번 선거에서 새롭게 등장한 안타까운 현상이다. 그 조짐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나타났으나 이번처럼 표면화하지는 않았기에 더욱 걱정스럽다. 돌발상황이었지만 의외로 파장이 커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는 휘발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선거기간은 물론이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우리 모두를 불편하고 찜찜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세대갈등을 호재라고 여긴 일부 정당과 언론이 아예 이번 선거전을 ‘2030 대 5060의 대결’이라거나 ‘40대가 판세 가른다’며 갈등을 부추기고 편가르기를 한 것이 한몫했다.

생뚱맞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세대갈등이 선거판을 휘저을 그 무렵,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재용씨가 기업인 30명으로부터 결혼축의금으로 16억원을 받았다는 법정 진술이 나왔다. 거액의 축의금도 놀라웠지만 외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한 재태크 솜씨를 발휘해 그 돈을 100억원대로 불려주었다고 하니 세대갈등에 대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리기도 한다. 어쨌든 부패정치 청산 대상 1호는 전 전 대통령이어야 한다.

총선 이후 국민들의 관심은 헌법재판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처리로 옮겨갈 것이다. 탄핵 찬반세력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특정 정치세력이나 언론이 그 결과에 따라 또다시 세대갈등을 부추기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이제 ‘새싹’과 ‘낙엽’이 어우러져 갈등을 뛰어넘고 지역주의와 부패정치를 청산하는 데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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