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평 남짓한 마늘밭을 갈고 있는 남편이 팔을 쭉 뻗으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9월이 돼도 내내 해가 식을 줄 모르더니, 며칠 전부터 갑자기 선선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날씨 덕분에 여유가 넘실댄다. 남편과 마주 앉아 소소한 작당 모의를 한다. 메모지를 한 장 꺼내 들고 심어야 할 것들을 적어 내려간다. 고생스러운 육체노동이 따라올 것이 뻔한데도 쇼핑 목록을 작성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즐겁다!
겨자잎과 루콜라, 로메인을 비롯해 자주 먹는 잎채소는 9월에 미리 씨앗을 뿌려놓았다. 이제 목록에는 시금치, 양배추, 호밀과 보리 그리고 무, 마늘, 양파처럼 1년 동안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는 작물이 채워진다.
지난해에는 봄 농사에 온 힘을 쏟은 나머지 가을 농사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농사 체력이 1학기에 모두 소진됐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에 큰 기대 없이 심어본 양파 농사에 나름대로 성공하고 나니(1년 동안 양파를 한 번도 사지 않았다!) 올해는 괜히 마음이 바쁘다.
올 하반기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다음해 상반기에 마늘종도 볶아 먹고, 추위를 견뎌낸 달달한 시금치와 봄동도 무쳐 먹고, 늦봄엔 완두콩을 넣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며 벌써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켜본다. 농부는 적어도 두 계절을 앞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니.
지난해 가을, 김장철이 오기 전에 심어볼 법한 무 하나 못 심고 모든 시기를 그냥 지나쳐버린 아쉬움이 컸다. 해가 바뀌어 봄이 오고, 겨우내 밭을 지킨 채소가 하나둘 쏟아져 나오자 그제야 현실 자각 시간이 찾아왔다. 그 시기에 거둘 것이 아무것도 없던 우리는 농협 로컬푸드 코너를 기웃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빈 땅에 시금치나 냉이 씨앗이라도 뿌려놓을걸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우리 밭에는 왜 그 흔한 냉이조차 나지 않는 것인지!
얼마 전 씨마늘을 사러 장에 들렀다. 마늘을 심으려 한다고 했더니 채소가게 상인분이 심는 법부터 기르는 법, 수확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세심한 농사 상담에 감탄하며 홀린 듯 마늘 반 자루를 사왔다. 마늘을 자루로 사본 건 처음이었다. 투자금을 6만원이나 들였으니 마늘을 그냥 썩힐 수는 없다.
작물 목록 중 기대되는 것 하나는 호밀이다. 호밀은 뿌리를 깊게 내려 토양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예전부터 가을 작물로 꼭 심어보고 싶었다. 얼마 전 장흥에서 농사짓는 친구가 앉은키통밀을 한 통 나눠줬는데, 직접 키워 제분까지 한 귀한 식재료였다. 집에서 식사빵을 직접 굽는 터라, 앉은키통밀의 고소함과 향긋함을 맛본 순간 호밀을 심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마침 친구가 호밀을 심어보라며 종자를 나눠주겠다고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넙죽 받을 예정이다.
열심히 적어 내려간 목록과 심으려고 모아둔 씨앗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하루에 한두 평씩 정해 땅을 정비한다. 한번에 몰아치면 번아웃이 오니 오늘도 내일도 조금씩, 조금씩 해나간다.
글·사진 이지은 패브릭·그래픽 스튜디오 달리오로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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