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의 상징 은방울꽃은 푸른 풀잎의 싱그러움과 순백 꽃잎의 청초함을 향기로 재현해 고급 향수의 원료로 쓰인다. 허태임 제공
은방울꽃은 그 생김새에 마침맞은 쉽고 단순한 이름을 가졌다. 초록색 가지런히 놓인 두 장의 잎사귀 사이에서 꽃대가 쏘옥 올라와서는 새하얀 방울 모양의 꽃 여러 개를 조롱조롱 달고 있다. 방울을 닮은 난초라는 뜻에서 한자로는 영란(鈴蘭)이다. 처마 끝에 다는 풍경에 비유한 풍경란(風磬蘭)이라는 이름도 있다.
전국의 산과 들로 식물을 만나러 꽤 오랜 시간 다니면서 나는 5월에 피는 은방울꽃에 반복해서 반했다. 5월을 대표하는 야생의 꽃이 은방울꽃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인위적으로 매만진 원예종의 화려함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대로 자란 자생의 우아함과 기품을 제대로 알게 해준 존재가 내게는 은방울꽃이다.
은방울꽃은 유명 연예인들의 결혼식 부케로 등장하며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유럽에서는 꽃이 더 많이 피도록 개량한 은방울꽃 품종을 예식용으로 쓴다. 국내에서는 그 재배 식물을 수입하다보니 비싸게 거래된다고 들었다. 그러면 우리 땅에 사는 은방울꽃은 없냐, 그렇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지구에는 세 종(種)의 은방울꽃이 있다. 한반도를 비롯해 동아시아에 사는 은방울꽃, 미국 애팔래치아산맥 일대에만 사는 북미은방울꽃, 유럽에서 코카서스(캅카스)에 걸쳐 드넓게 사는 유럽은방울꽃이 그들이다. 셋 다 비슷하게 생겼다. 아주 먼 옛날 이들은 하나였을 것이다. 과거 빙하기 시절, 시베리아 동부와 알래스카 사이의 베링해협은 지금처럼 바다가 아니라 육지로 연결된 거대한 초원이었다. 동물과 식물은 북반구의 그 광활한 대륙을 오가며 넓게 퍼져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자 연결됐던 땅이 바다 아래로 잠겼다. 대륙이 서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를 기원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은방울꽃이 세 갈래 길로 흩어지게 된 까닭이다. 긴 시간 동안 분리된 채 각자 뿌리내린 내륙 환경에 적응해 살다보니 지금의 세 종으로 분화했다.
그중 유럽은방울꽃이 나머지 두 종보다 꽃이 유난히 크고 많이 달린다. 유럽은방울꽃 한 송이는 강낭콩만 하고 동아시아의 것은 서리태 정도다. 북미의 것은 팥알 크기로 가장 작다. 꽃줄기 하나에 달리는 꽃의 수는 유럽은방울꽃이 스무 개 안팎이고 나머지 둘은 그 절반에 그친다. 수분 매개 곤충의 경쟁이 훨씬 치열한 환경에서 그들을 유인하려고 유럽은방울꽃은 더 많은 꽃을 피우고 멀리서부터 강한 향기를 보낸다. 이 꽃의 꽃밥에서 출발한 정핵(精核)이 저 꽃의 암술머리에 닿아 종국에는 결실에 이르기 위한 탁월한 전략이다.
반면 동아시아와 북미의 은방울꽃은 땅속 뿌리줄기를 늘리는 식으로 영양번식에 에너지를 더 쓴다. 다소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외향보다는 잎과 뿌리를 더 튼튼하게, 내구력을 기른 것이다. 특히 북미은방울꽃은 해발고도 1천m 이상의 고산지대, 하고도 산성암 기반에만 사는 식으로 애팔래치아산맥에 적응했다. 달리 말해 비옥한 땅에서 밀리고 밀려 그 산정까지 가서야 승부를 면한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의 기후위기는 그 땅마저 위협한다. 북미은방울꽃은 그 지역의 고유종인 동시에 멸종위기종이다.
한반도를 포함해 동아시아에 드넓게 사는 우리 은방울꽃은 숲의 가장자리, 반그늘, 높은 산지부터 비교적 낮은 지대까지 너른 분포 범위를 지닌다. 그래서 국내 내륙의 웬만한 산에는 사람이 애써 심어 기르지 않아도 고맙게도 은방울꽃이 거의 다 산다. 하지만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인다. 비교적 깊은 숲에서 땅 가까이 아주 낮게 살기 때문이다. 눈높이를 최대한 맞춰야 겨우 알아볼 수 있다. 그전에 그들이 사는 환경과 꽃이 피는 적기를 먼저 짐작해야 한다. 그러한 장벽을 뚫고 운 좋게 꽃을 마주했다면 산길을 가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시신경으로 알아차리기 전에 향기에 먼저 붙잡힐 수 있다. 그만큼 은방울꽃은 꽃이 예쁘기도 하고 향까지 정말 근사하다.
우리 할머니는 은방울꽃을 향수란(香水蘭)이라고 불렀다. 봄이 와서 산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나를 동네 뒷산으로 자주 데리고 다녔다. 선산이 그곳에 있었다. 할머니는 봉분을 다듬다가 주변에 핀 꽃들을 가리키며 식물의 이름을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확한 이름이 아니라 그이만의 애칭이었다. 두견새가 이 꽃을 알고 찾아온다며 진달래를 두견화라 부르는 식이었다. “향수란 꽃내가 얼마나 짙은지 한번 맡아보렴.” 무덤 너머 꽃자리를 짚던 할머니의 손가락 끝에는 은방울꽃이 피어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깨끗하고 투명한 향이라고 하면 좋을까. 장미처럼 화려하거나 재스민처럼 진득하지 않다. 갓 피어난 풀잎의 싱그러움과 순백 꽃잎의 청초함을 은방울꽃은 향기로 재현한다. 세계적인 명품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생전에 유독 사랑했던 식물이 이 꽃이다. 정확하게는 향기에 매료됐겠지. 자신이 가꾸던 정원에서 유럽은방울꽃 향기에 영감을 얻어 ‘나의 영혼을 표현한 향’이라며 1950년대에 향수를 만들었다. 그 제품은 지금도 화장품 업계에서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다. 조향사들은 “비가 그친 뒤 숲속의 맑은 공기와도 같고 한편으로는 빳빳하게 잘 마른 흰 면셔츠에서 날 법한 순수하고 고결한 느낌”이라고 그 향수를 설명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11년 영화 ‘멜랑콜리아’ 포스터. 씨네21
덴마크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 ‘멜랑콜리아’에 은방울꽃이 등장한다. 2012년 그 영화가 국내에 개봉했을 때 나를 극장 안으로 가장 세게 잡아끈 건 포스터였다. 은방울꽃 부케를 든 주인공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 한 컷이 무척 강렬했고 깊었다. 영화는 고질적인 우울증으로 비정상적인 행동을 끊지 못하는 주인공과 그를 보살피는 언니를 중심으로 거대한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이 교차하며 펼쳐지는 판타지 형식이다. 감독은 은방울꽃의 모순된 면을 상징적으로 담고자 한 걸까.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아름다우면서도 파괴적인 속성, 감춰진 죽음의 신호, 행복이라는 독을 품은 채 죽음을 향해 떠내려가는 인간의 영혼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은유. 은방울꽃의 생리적이고 생태적인 속성이 그렇다. 겉으론 가냘프고 순정해 보이지만 동물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독을 몸에 지니고 있다. 은방울꽃은 치명적인 독초인 것이다. 또 은방울꽃은 맑고 밝아 보이는 외형과 달리 음지를 선호하는 생명체다. 햇빛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힘을 못 쓴다.
당시 대학원 생활을 하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연구와 불확실한 장래를 탓하며 불안해하던 나였다. 초조했고 내가 나를 자꾸만 다그쳤고 어두운 쪽으로 내몰았다. ‘재난이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내면일까 외부일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작게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그 영화가 어쩌면 은방울꽃이 때맞춰 보낸 응원과 위로의 전언(傳言)이었을까.

1851년 5월1일 은방울꽃이 그려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초상화. 영국 윈저성 왕실 컬렉션
우리 모두, “해피 메이 데이!”(Happy May Day!)
전세계 노동절인 5월1일, 유럽의 거리에는 은방울꽃을 선물하는 근사한 풍경이 펼쳐진다. 프랑스 사람들은 은방울꽃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은방울꽃의 프랑스어 꽃말은 ‘행복의 귀환’(Retour de bonheur)이다. 가정의 달 5월을 보내며 사랑하는 사람, 특히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행운의 증표처럼 선물한다고 들었다. “당신에게 행운이 깃들길.” 은방울꽃을 바치며 인사하는 문화는 프랑스에서 16세기부터 유행했고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회화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 화가 프란츠 자베르 빈터할터(1805~1873)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을 위해 아서 왕자의 첫 생일(1851년 5월1일)을 기념해 그린 초상화에 은방울꽃이 등장한다. 단순한 꽃이 아니라 신의 축복과 행운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쓰인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가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되새기는 5월이 되면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 여러 대륙에는 어김없이 은방울꽃이 만개한다. 숭고한 노동에 행운이 깃들기를 희망하는 꽃들의 격려가 짤랑짤랑 세계 곳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우리 모두, 해피 메이 데이!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숲을 읽는 사람’ 저자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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