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화나무.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
박새와 직박구리가 회화나무 열매를 맛있게 먹고 있다. 1월 중순의 일이다. 회화나무는 무더운 여름에 꽃이 피고 가을이 깊어갈 때 열매를 맺는다. 추위와 바람을 맞으며 회화나무는 겨우내 그 열매를 가지에 달고 산다. 그래서 먹을 것이 귀한 겨울에 새들은 회화나무를 즐겨 찾는다. 덕분에 나는 회화나무와 회화나무를 찾아오는 새가 만든 풍경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린다.

앙상한 가지에 겨우내 열매를 달고 있는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콩과 식물’이다. 콩알 같은 씨앗이 꼬투리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 여느 콩과 식물과 달리 아무리 익어도 꼬투리가 벌어지지 않는다. 열매껍질과 씨앗이 서로 딱 붙어 있어서다. 새들은 그 사실을 벌써 아는지 껍질을 벗길 생각도 안 하고 염주알처럼 잘록잘록하고 끈적한 열매를 꼬투리째 먹는다. 입이 큰 직박구리는 뜯어 먹고 입이 작은 박새는 특정 지점을 쪼듯이 먹는다. 단순히 열량을 채우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회화나무 열매에는 영양분이 정말 많으니까.
허 박사, 회화나무라고 알아?
식물에서 인간의 몸에 이로운 성분을 찾는 ‘식물 추출물’ 연구를 하는 동료 K가 몇 해 전 내게 회화나무를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조금 안다고 대답했다.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어?
트램 승차장 근처에 수형이 아주 근사한 친구가 있어요.
어머, 우리 수목원에도 회화나무가 있어?
그럼요. 우리 밥 먹으러 가는 구내식당 주차장에도 있고 그 맞은편 가든스테이 숙소와 직원 숙소 주차장에도 여러 그루 있어요. 이 동네 주변 고택과 정자에 사는 고목도 있고요. 중앙고속도로 하행선 경북 안동에서 군위 구간에 회화나무 가로수가 수십 그루 도열해 있고요. 어디 보자 또….
동료 K는 중요한 실마리를 찾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사연을 갖고 사는 다른 지방의 회화나무 이야기를 조금 더 풀려고 하니 이미 충분하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 몸에 좋은 성분을 회화나무 열매껍질에서 얻을 수 있다는 논문을 봤어. 나도 그쪽을 파고 싶은데 어디 가서 회화나무를 구해야 하나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내가 잘 찾아왔네. 정말 고마워.
나는 도울 일이 있으면 청하라고 화답하며 불끈 응원의 주먹을 쥐어 보였다.

청와대 담장 너머에 사는 회화나무 고목. 나무 뒤로 북악산이 근사한 배경이 된다.
회화나무를 한자로는 괴(槐)라 한다. 그 콩꼬투리는 괴각(槐角), 꽃봉오리는 쌀알을 닮아 괴미(槐米)라 한다. 괴각과 괴미는 예로부터 한약재로 널리 쓰였고 실제로 한방에서 부르는 부위별 이름이다. 또 괴각과 괴미는 노랗거나 밝은 잿빛을 얻는 염료이기도 한데 주로 비단을 물들일 때 쓴다. 인디고와 섞으면 고급스러운 녹색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서울에서 약속이 잡히면 가능하면 궁궐에서 만나자고 제안한다. 나무가 많으니 걷기에 좋고 볼거리도 많아서다. 그곳에 주로 회화나무가 있다. 추운 겨울에는 창덕궁 돈화문 근처 카페에서 궁궐 담장 밖으로 나온 회화나무 우듬지를 함께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식이다. 수능을 앞둔 언제던가 조계사의 회화나무 앞에서 약속을 잡았는데 그날따라 나무 앞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이유를 알고 보니 그 나무가 시험에 붙게 해준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것이었다.
회화나무는 중국 원산의 식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아주 먼 과거부터 회화나무를 학자를 양성하는 나무, 즉 학자수(學者樹)로 칭했다. 우리 선조는 과거급제와 연관 지어 공부하는 이들이 머무는 중요한 곳이면 으레 회화나무를 심었다. 민가 주변에 회화나무가 많이 사는 이유다. 학계 일부에서는 우리 땅에서 회화나무가 살아온 그 아득한 시간을 생각하면 회화나무를 우리 자생식물로 봐도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다. 중국에서 도입된 시기를 확정할 수 없고 국내에 널리 퍼져 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궁궐 안에 사는 회화나무가 등장한다. 그보다 앞서 나온 ‘삼국사기’를 근거로 신라 건국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는 경주 계림의 회화나무는 2천 년 이전부터 그 숲의 구성 수종이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실제로 서양에서는 회화나무를 중국과 한국 원산이라고 소개한다.

만개한 회화나무. 벨기에 사진작가 장폴 그랑몽의 작품이다.
여름에 꽃이 만개하면 회화나무는 벌들의 차지다. 꿀을 빨아 오는 원천이 되는 회화나무를 여러 종류의 벌이 열렬히 찾아온다. 그중에서도 나는 가위벌에 관심이 많다. 가위벌은 날렵한 턱으로 식물의 잎을 잘 오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구멍에 둥지를 틀고 동그랗게 잘라 모은 식물의 잎이나 식물에서 얻은 털과 끈끈한 점액 등으로 자식인 애벌레의 집을 짓는다. 가위벌은 꽃가루받이 전문이라 풍년을 기대하는 농사에 이로운 벌이다. 사과꽃을 수정시켜서 사과가 열리게 하는 곤충으로 서양에서 각광받는다. 북미와 뉴질랜드에서는 과수 농사에 가위벌을 활용하는데 심지어 동아시아에 사는 왕가위벌을 농업용으로 도입했을 정도다.
가위벌 가운데도 내가 왕가위벌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왕가위벌이 회화나무와 애착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 건너가서도 고향의 회화나무를 기억하는 왕가위벌.
국경을 불문하고 벌의 감소가 큰 문제로 떠오르며 최근 벌과 관련한 연구가 부쩍 늘었다. 대부분 꿀벌에 대한 연구다. 최근 조금 색다른 연구가 등장해서 나는 푹 빠져 읽었다. 2025년 11월26일 발행된 ‘벌에 관한 학술지’(Apidologie) 제56권에 실린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수분 매개체 연구센터 팀의 가위벌 연구. 논문은 인간이 관리하는 꿀벌뿐 아니라 더 많은 야생벌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는 서론을 시작으로 그 지역 도시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가위벌 세 종을 2년간 집요하게 관찰한 결과를 다룬다. 어떤 재료와 방식으로 가위벌이 둥지를 짓고 자식을 키우는지, 꽃가루와 꿀을 얻으려 어떤 식물을 찾아가는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개발 행위가 그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주된 내용이다.
세 종의 벌이 사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가장 인상적인 건, 유일하게 동아시아에서 건너간 왕가위벌만이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 북미로 도입된 회화나무에서만 꽃가루를 모아 자식을 먹이고 꿀을 수집한다는 사실이었다. 주변에 사는 여러 종류의 식물을 이용하는 나머지 두 종과는 달랐다. 다시 말해 왕가위벌은 고향에서 온 회화나무를 기억하고 그 나무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회화나무 꽃. 꽃이 피면 회화나무는 꽃가루를 채집하러 오는 벌들의 차지다. 같은 혈통의 콩과 식물인 아까시나무를 닮았다.
이런 결과도 흥미로웠다. 세 종의 벌이 먹은 식물의 꽃가루 중 단백질과 지질의 함량을 비율로 따져보니 지질 대비 단백질량이 가장 높은 식물은 회화나무라는 것. 왕가위벌은 고단백 꽃가루를 골라 자식에게 먹인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관찰한 세 종의 벌 중에 왕가위벌이 덩치가 가장 컸다. 몸집에 비례해서 둥지의 구멍도 왕가위벌이 가장 크다. 또 특이한 점은, 왕가위벌은 둥지를 지을 때 식물의 잎을 오려 쓰기보다 식물에서 구한 끈적끈적한 물질인 수지(樹脂)를 재료로 쓴다는 사실이다. 논문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그러한 사실에서 나는 과학이 주는 일종의 환희를 느낀다. 한 편의 논문을 읽으며 연구 과정과 논리적 전개와 결과를 따져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지만, 식물뿐 아니라 더 많은 자연을 이해하는 단서를 그 안에서 얻을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논문 읽기를 게을리할 수 없다. 논문을 읽을수록 그 세계에 자꾸 더 빠져든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팀의 연구는 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관찰한 결과물로, 실제 담고자 했던 인간의 개발 행위가 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결과는 없었다. 아쉬웠지만 이 논문을 바탕으로 후속 연구가 다양하고 깊이 있게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중국의 그 많은 회화나무 중에도 가장 유명한 것은 산시성 훙둥현의 회화나무 고목이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영락제는 1421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던 당시 인구가 적은 허베이 지역을 보충하기 위해 인구가 비교적 많은 산시성에서 이주정책을 펼쳤다. 이주민들은 훙둥에 집결했는데, 이때 훙둥 회화나무의 씨앗과 가지를 가져다가 새로 정착한 곳에 심고서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왕가위벌처럼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민요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내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회화나무라 답하겠네.”

회화나무 고목. 출처: 영국큐왕립식물원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숲을 읽는 사람’ 저자
※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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